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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by 책읽는아이린

낭독모임에서 열하일기를 읽기 시작했다. 작년 여름에 한 번 읽었는데 낭독으로 한 번 더 여행한다. 눈으로 읽을 때보다 여행기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느낌이다. 고미숙 작가는 열하일기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단 하나의 텍스트만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 열하일기를 들 것이다.' 또, '그것은 이질적인 대상들과의 뜨거운 접속 과정이고, 침묵하고 있던 말과 사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발굴의 현장이며, 예기치 않은 담론들이 범람하는 생성의 장이다.' 1780년 5월 25일부터 10월 27일까지 그 여정을 따라가 보며 기록해 본다.


40대 중반의 박지원은 삼종형 박명원이 건륭 황제의 만수절(70세 생일) 축하 사절로 가게 되면서 개인수행원 자격으로 동행한다.



여정

압록강을 건너면서 시작된다. 애초의 목적지는 연경(지금의 베이징), 압록강에서 연경까지 거리는 약 2천여 리이다. 800km 거리다. 찌는 듯한 무더위, 심하게는 하루에 일고여덟번 씩 강을 건너면서 생사를 넘나드는 아찔한 순간들을 겪기도 했다. 날짜가 빠듯해, 쉴 새 없이 달리니 말들은 쓰러지고 일행은 더위를 먹어가며 마침내 연경에 도착한다.

그러나 황제는 연경에 없었다. 열하에 있는 산장에 가 있다는 것이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시 열하로 떠난다. 연경에서 열하까지는 700여 리. 무박 나흘을 달려가야 했다.

열하에서 겪은 가장 큰 사건은 뭐니 뭐니 해도 티베트불교와의 마주침이다. 당시 건륭 황제는 티베트의 법왕, 판첸라마를 스승으로 떠받들고 있었다. 황제는 조선 사신단에게 큰 선심을 쓴답시고 판첸라마를 친견하여 예를 표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성리학을 떠받들고 있던 조선 유학자들은 티베트불교를 이단이라 여겼다. 황제의 명을 따르긴 했으나, 접견을 대충 마쳐 황제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결국 6일 만에 다시 쫓기다시피 연경으로 되돌아온다. 여기서 여정은 끝이 난다.



유머

연암 박지원은 여정이 힘들고 고단할수록 더욱 왕성하게 관찰하고, 사유하고, 기록했다. 우울증을 앓았던 그는 웃음의 효과를 알았나 보다. 에피소드 하나를 말하면, 옥전현이라는 작은 마을을 지날 때였다. 벽에 쓰인 기이한 문장을 발견하고 촛불아래 베껴 쓴다. 이 문장이 유명한 <호질>이라고 한다. 이걸 왜 쓰냐는 물음에 '돌아가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번 읽혀 모두 허리를 잡고 한바탕 크게 웃게 할 작정입니다.' 사람들을 웃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따뜻하다.


우정

연암은 당대 집권세력인 노론 명문가 출신이다. 하지만, 과거를 포기하고 의기투합하는 벗들과 청춘을 보냈다. 홍대용과 박제가, 이덕무 등이 그의 친구들이다. 이들은 매일 밤 몰려다니며 '지식과 우정의 향연'을 펼쳤다.

그는 중국말을 할 줄 몰랐다. 하지만 따뜻한 시선과 웃음, 활발한 몸짓으로 단 며칠간의 만남으로도 중국인들을 친구로 만들었다. 장사꾼들은 그의 박학과 인품에 매료되었다. 연암은 그들의 외모와 지적 수준, 인생 편력, 그리고 동작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포착해 낸다. 또,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데 마음을 열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며 우정을 나눈다.


유목

강을 건널 때 연암은 이런 말을 한다.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게 아닐세. 바로 저편 언덕에 있거든. 이 강은 바로 저들과 우리의 경계로서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지.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 또한 저 물가 언덕과 같다네. 그러므로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라, 언덕과 물 그 '사이'에 있는 것이라네."

그 사이는 제3의 경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삶의 구체적 장면 속에서 구성돼야 한다고 책은 말한다. 길은 가고 있는 사람이 개척해야 하고, 그 길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타내야 할까 생각해 본다.

연암은 여행 막바지에서 자신이 던진 화두에 대한 답 하나를 찾아낸다. 고복구장성을 지나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는 강행군을 할 때다. 폭우로 범람한 강을 건너는데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이었다. 그때 그는 명심, 어두운 마음을 깨닫는다. 여기서 명심은 분별망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즉 주체와 대상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 그는 즉 '물이 땅이 되고 물이 옷이 되고, 물이 몸이 되고 물이 마음이 되는' 생성의 장이 그가 도달한 도의 경지다. 사람 사이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상대가 나고, 내가 상대라 생각하고 구분하지 않는 마음도 포함되리라. 세상의 분별과 분류에서 차별이 생겨나고 여러 비극을 만들어내고 있어 그가 깨달은 도는 현시대에도 화두를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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