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북극곰 Jan 16. 2020

며느리를 구해줘.

92년생 이이무개의 명절

남아선호 사상을 가진 할머니와 함께 산 것이 어쩌면 내가 좀 더 남녀평등, 페미니즘에 눈을 뜰 수 있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어릴 때 할머니 댁에서 남동생과 밥을 먹을 때면,

조그마한 밥상에 할머니는 고기반찬을 열심히 남동생 앞으로 밀어놓았다. 너무 뻔히 보이게 하는 행동이었지만, 할머니는 작은 밥상 안에 그 차별적인 행동으로 내가 받을 불쾌감과 상처는 염두하지 않으셨다. 오로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에 대한 사랑만 생각하셨다.


그리고 작년 추석에도 이미 청년이 다 된 손주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다시 한번 보여주셨다. 차례상에 절을 하는데 나이순으로 첫째부터 차례대로 하다가 내 차례가 되자 남동생 먼저 해야 한다며 “머시마 먼저 혀야 혀, 머시마 먼저"를 외치셨다. 할머니 눈에는 고작 3살 터울의 나이보다 성별이 서열을 결정짓는 요소인 것이다. 뭐 사실 어릴 때는, 차례상 앞에 여자들은 나오는 거 아니라고 방문 밖을 나서지 못하게 할 때도 있었으니 남동생 먼저 절을 하게 하는 건 애교쯤으로 여겨진다. 할머니의 세계에서는 손주보다 누나인 내가 먼저 절하는 게 목에 핏대 세울 정도로 크나큰 일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을 뿐이다.

'아직도 여전하시구나. 여전히 할머니는 60년대를 살고 계시는구나.'
속으로 생각할 뿐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경험해온 일은 곧 30살을 앞둔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었다. 시대는 변화하고 있는데 할머니의 시간은 아주 꼿꼿하게 60년대에 멈춰있다.


과연 할머니만 60년대만 살고 계신 걸까?

아직도 우리는 시대에 맞지 않는 고정관념에 갇혀 생각하고 표현하는 말과 행동들이 너무나 많다. 가령 여자라면 "네가 여자니깐 집안일도 할 줄 알아야 해", '여자애가 깔끔하지 못하게." 등의 소리를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여자가 집안일과 살림과 요리를 잘하면 "여성스럽다"라고 표현되고 "시집보내도 되겠다."라고 한다. 반면, 집안일과 살림, 요리를 잘하는 남자에게는 "아내에게 사랑받겠다.", "가정적이다."라고 말한다. 여자에게 집안일을 하는 것은 당연히 행해야 하는 것, 남자에게 집안일을 하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하고 대견한 것이다. 다행히 지금은 조금 시대가 바뀌어 남자도 집안일을 하고 육아를 함께 한다고 해도 아직도 살림과 육아에 대한 부분은 여자에게 편중된 것이 사실이다.


특히나 옛부터  내려온 것을 되새기는 명절이 되면 여자 그중에서도 며느리의 시간은 아주 가부장적인 시대로 회귀한다. 예를 들어 명절날 온 가족이 다 모인 자리에서 "설거지"는 엄마 혹은 며느리의 몫이다. 음식을 함께 먹는데 음식을 준비하는 일부터 정리하는 일까지 오로지 여자의 몫이다. ’ 며느리가 되면 "설거지"는 통과의례인 건가? 밥 먹고 편히 쉬는 건 남자로 태어나야만 얻을 수 있는 권리인가?’ 늘 의문이었다.


최근에 SNS에서 명절날 부부 싸움한 신혼부부의 일화를 본 적이 있다. 새댁이 된 부인이 시댁에서 명절날 오전부터 버섯전을 부치면서 몇 개 집어먹었더니 일은 안 하고 먹기만 한다고 시댁에서 핀잔을 들은 일화였다. 그 얘기를 들은 처가에서는 귀한 딸이 시댁에서 전을 부치는 것도 모자라 본인이 부친 전을 몇 개 주워 먹었다고 먹기만 한다는 핀잔을 들은 게 얼마나 가슴 아팠으랴. 버섯전을 먹었다고 시댁에서 혼난 딸을 본 아빠는 시댁에 전화하여 "이렇게 대할 거면 내 귀한 딸 명절에 시댁에 안 보내겠다. 나도 새우튀김 좋아하는데 사위에게 새우튀김을 튀겨오라고 하겠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명절만 되면 버섯을 선물세트로 사돈댁에 보내 무언의 경고를 보낸다는 것이다. 덕분에 며느리는 명절에 시댁에 가도 귀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는 일화였다. 시대가 변해 남녀 차별 없이 똑같이 각자의 집에서 사랑받고 자랐지만 여자의 삶은 결혼하고 온 식구가 모인 순간 지극히 가부장적인 시대로 회귀한다. 그리고 그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 며느리를 구해줄 사람도 서열 높은 남자뿐이라는 사실은 슬프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이렇게 가부장적인 명절만 되면 나는 '비혼'을 고민하게 된다. 아들과 며느리를 넘어 손주와 손녀까지 차별하던 우리 할머니와의 명절은 늘 불편하였으니 말이다. 결혼을 하면 명절날 할머니의 손주사랑을 안 볼 순 있겠지만 이제는 또 다른 차별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우리의 명절은 언제쯤이면 여자들도 똑같이 즐길 수 있는 날이 될까?

작가의 이전글 손절의 미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