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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성호 Sep 20. 2017

우린 썸일까? 사랑일까?

썸과 사랑의 모호한 경계선에 관하여

                                       

                               

언제부터인가 '썸'이라는 단어는, 표준어 '사랑'에 버금가는 인지도를 얻었다. 그리고 이 단어는 그 인기에 힘입어  커플과 솔로의 경계선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고, 그 후로 지구 상의 모든 남녀는 4가지 부류의 사람으로 나누어졌다.


사랑하는 자, 사랑하지 않는 자
썸 타는 자, 썸 타지 않는 자.




썸은 데우고 태워지고,
사랑은 식히고 꺼진다.


썸이라는 표현은 ‘썸싱을 타다(There is something between us)’에서 나온 말로 남녀 간의 미묘한 탐색을 지칭하는 신조어다. 썸은 얼핏 보면 사랑과 비슷해 보이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마치 영단어 'Love'와 'Like'처럼 말이다.


썸은 어쩌면 태워지는 과정 그 자체인지 모른다. 썸 타는 이들은 서로에게 조금씩 마음을 데워가며 뜨거워지고, 그러다 쿵짝이 맞으면 이내 타오른다. 썸 단계에 머문 이들은 상대의 마음을 확신할 수 없기에 애간장이 타기도, 상대를 향한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이 활활 타오르기도 하고, 또 때론 상대에 대한 마음을 스스로 태워 없애버리기도 한다. 어쩌면 그래서 썸은 다들 '타는'거라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타들어가는 과정이니까.


반면 사랑은 식어가는 과정이다. 사랑에 완벽하게 빠질 땐 끝을 모르고 계속 뜨거워진다. 그러다 그 정점을 찍게 되고, 그 정점을 기점으로 서서히 식혀진다. 잘 식혀진 감정은 그 은은한 불꽃과 적당한 온도의 뜨거움으로 계속 남고, 완전히 식혀지고 꺼진 감정은 한 줌 재가 되어 사라진다. 그래서 사랑은 절정의 뜨거운 온도에서 따뜻하게 식혀지느냐, 차갑게 식어가느냐가 관건이다.





썸은 동전의 앞면을 보고,
사랑은 그 뒷면을 본다.


썸의 영역에 있는 우린 보통 나의 강점을 최대치로 부각해 상대에게 어필한다. 그리고 상대방을 볼 때에도 마찬가지로 보이는 면만을 확장해서 해석한다. 그래서 이땐 서로가 근사한 신사숙녀가 된다. 그러나 사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점점 서로가 보지 않았던, 보이지 않았던 모습을 자연스레 알게 되고, 양복을 갖춰 입던 신사숙녀는 서서히 평상복으로 바꿔 입기 시작한다. 그리고 멀지 않은 시기에 잠옷 바람으로 모두 갈아입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들이 결코 상실의 과정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처음에는 익숙해지는 게 낯설고 두렵지만, 그 감정들은 결국 친숙함과 정겨움에 도달하기 마련이니 말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사랑이 종결되어 또 다른 썸을 찾아 각자의 길을 갈지도 모르지만.)




썸은 남남으로 시작되고,
사랑은 우리로 종결된다.


썸은 완벽한 '나'와 '너'의 관계다. '우리'라 부르기는 다소 힘든 단계다. 서로의 라이프스타일에 간섭할 권리도 없고 관여해서도 안 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내 삶 겉 테두리에서의 만남. 어쩌면 그게 썸의 만남일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점점 서로에게 결속되는 단계다. 알게 모르게 서로의 삶에 관심과 개입이 생겨나고, 내 삶 테두리를 돌던 감정들은 어느새 내 안 깊숙이 자리하게 된다. 그렇게 점점 더 서로에게 깊어지고 가까워져 그 속에서 누군가는 미래를 함께하는 사람으로 남고, 누군가는 아름다운 기억으로 추억된다.





결국 사랑은 썸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랑은 바다와 같아서 맑은 날엔 에메랄드 빛의 환한 모습으로 내게 다가오다 가도, 흐린 날엔 어김없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달려든다. 그러나 이제 막 시작하는 이들의 바다에 어찌 흐린 날이 있으랴, 모든 시작의 바다는 분명 에메랄드 빛의 푸른 바다일 것이다. 발을 담그고 눈을 맞출 수 있게 하는 설렘파도 가득한 예쁜 바다. 그렇게 깊은 사랑은 얕은 썸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깊은 바다에 들어가기 위해선 먼저 얕은 수심에 발을 내디뎌야 하듯, 썸과 사랑의 차이는 결국 그 깊이에 존재하는 것일테니까.


그래서 둘은 비록 동의어의 관계는 아니지만, 파생어 정도의 관계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썸은 사랑이 되어가는 과정이니까. 사랑은 다름 아닌 썸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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