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기: 더 킬러-죽어도 되는 아이
죽어도 되는 아이라는 부제가 충격적이었다. 세상에 그런 아이가 있을까? 부제는 상반된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이 되었다. '그 아이가 죽어 마땅하다는 것'과 '누군가 그 아이가 죽도록 방치한다'는 것이다. 킬러가 주인공인 영화에서 ‘죽어도 되는 아이’에 대한 정의는 중요하다. 영화의 주제와 줄거리를 결정하기 때문인데, 이 작품은 후자의 의미를 다루었다.
영화 속의 아이(이서영 분)는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관객은 알면 알수록 그 학생이 황당하며 기구한 상황에 던져진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어른들에 의해서... 다행인 점은 그 사실을 킬러와 관객만 알게 했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만 알 뿐, 진실의 내막은 몰랐다.
아이는 여고생이었다. 감독은 사춘기 여고생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몸은 성인이 되었으나, 정신은 성인이 채 되지 않은 부조화 상태의 존재이다. 따라서 감독은 성인 관객의 관점에서 납득되지 않는 사건의 전개는 모두 청소년들이 담당하게 했다. 예측할 수 없는 존재들의 선택이 무작위적 상황을 유발해서 관객의 예측을 어렵게 했다.
놀랍게도 킬러(장혁 분)는 그런 청소년의 특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자녀를 키워본 적도 없는데, 청소년의 특징, 행동, 심리에 대해 어떻게 잘 알고 있는 걸까? 최고의 킬러는 대상에 대한 이해가 우선이었고, 청소년의 살해까지 의뢰받은 경험이 있음을 복선으로 알려주었다. 이는 역설적이게 그가 최고의 킬러임을 입증해 주었다.
영화적 장치라 할 수 있는 것은 고정관념 속 캐릭터인 킬러, 형사, 판사의 이미지와 정반대의 설정이었다. 통념적인 인식과 달리 킬러가 선, 형사와 판사가 악을 맡았다. 부조리한 세상에 부조리한 방법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묘하게 설득적이었다.
킬러가 선인 이유는 사회적 가치를 지키려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살인을 하는 범죄자이지만, 명분이 있었다. 내 가족과 지인을 지키려는 분명한 목적은 극도로 단순한 행동을 이끌어 내었다. 필요한 것을 취한 후, 살상하는 일이다. 그것이 킬러를 선한 범죄자로 만들었다. 반면, 정의와 사회적 인정의 보호 아래에서 권력을 남용한 추태와 범행을 저지르는 사회 지도층이 등장했다. 이들은 국내 범죄조직과 결탁하는 수준을 넘어 해외 조직과 손을 잡았다.
언제부터인가 해외 범죄 조직이 국내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잔인무도한 범죄자들에게 무력하게 희생되는 사람도 늘었다. 성폭력과 마약 등의 사건이 음지에서 자행되는 보도가 늘고 있기에, 허구적 설정으로 치부하기 어려웠다. 이미 여러 편의 국내 영화들도 이 문제를 다루고 있기에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 영화는 러닝 타임이 짧은 편이라 순식간에 영화가 전개되어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 점은 좋았으나, 극 중 캐릭터의 특성이 부각될 시간은 부족해서 아쉬웠다. 가장 이상한 점을 하나 짚자면, 주인공 킬러가 자신의 맞수 같은 러시아 킬러(브르스 칸 분)를 살해하지 않고, 두 번이나 살려준 점을 들 수 있다.
주인공이 은퇴한 킬러라서 누구보다 킬러의 입장을 잘 알아서 봐준 것(?)으로 보기엔 어색했다. 다른 적들은 확인사살까지 하면서, 가장 강력한 적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결국 주인공은 그와 세 번의 대결을 했다. 그에 대한 마땅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강력한 맛수로 킬러를 돋보이게 하려는 감독의 의도였다.
영화 더 킬러는 배우 장혁의, 장혁에 의한, 장혁을 위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작에서 호흡을 함께 맞춘 적이 있는 최재훈 감독은 배우 장혁의 매력을 잘 알고 있었다. 장혁은 은둔의 킬러 역이 잘 어울리는 배우였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남자다움이란 무엇인가?
영화에서 그가 보여준 답은 나와 너를 지키는 약속과 싸움 실력, 냉정한 성격과 담담한 말솜씨, 그리고 잘생김이었다.
바쁜 일상과 생의 무게감이 현대인에게 무감각을 학습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합리적 의심이 들 때가 있다. 일상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긴장감을 늦출 수 없고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주변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된다.
죽어도 되는 아이란 무감각해진 현대인의 방치에서 시작되었다. 과거 우리 사회에는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관심을 갖고 애정을 쏟던 문화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습을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