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하면 사랑받을 줄 알았어.”
첫 직장에서 선배와 대화하다 들은 말이다. 그는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능력이 뛰어난 사람 가운데 하나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했는데, 음악을 만들고 할 줄 알며, 영어와 중국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한다. 당시 할 줄 아는 건 우리말밖에 없었던 나에게는 대단한 능력자처럼 보였고, 그런 선배의 능력에 찬사를 보냈다.
그런데 선배는 쑥스러웠던 건지 아니면 그저 평소 생각하던 걸 무심히 얘기했던 건지, 나의 감탄을 뒤로 하고 덧붙여 말했다. 그렇게 하면 사랑받을 거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익힌 거라고. 그렇게 말하는 선배의 말에서 어쩐지 씁쓸함이 느껴졌다.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인간은 사랑을 갈구하며 산다. 어설픈 이론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 중 하나는 동물 역시 사랑받기 좋아하지만 사랑받기를 평생 갈구하며 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과 생존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를 내밀 때, 몇몇 반려동물을 제외한다면 아마 거의 모든 동물은 생존을 택할 것이다.
반면에, 사랑받지 못함을 절망하며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소식이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걸 보면 인간에겐 아무래도 생존보다 사랑이 더 중요해 보인다. 왜,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하지 않았던가. 관심종자, 애정결핍, 인싸와 아싸. 이런 용어들에는 그만큼 사람들이 사랑을 갈구한다는 사실이 숨어있다. 인간의 3대 욕망이라는 돈, 권력, 명예마저도 사랑 앞에선 쉽게 무너진다.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돈도 자존심도 체면도 모두 내려놓으니까.
‘평범한 사람’의 삶을 객관적으로 요약하면 그야말로 ‘사랑받기 위해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지 모를 사람을 위해 혹은 어떤 한 사람을 위해, 그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외모를 관리하며 돈을 번다. 사랑에 실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볼 때 성공한 것 같아도 크게 낙담하고 심지어 자신의 생명을 끊기까지 한다. ‘이렇게 하면 네가 사랑해 줄 줄 알았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사랑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삶의 의미는 와르르 무너져 버린다.
나이가 들고 따지는 조건이 많아질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의 참된 모습이 더욱 선명해진다. 사랑은 ‘그렇게 하면’이라는 모든 수식어를 거부한다. 어떤 조건도 없이 오롯한 나 자신을 품어주는 사람. 모든 삶의 습관을 용서해 주는 사람. 나의 인생을 넉넉하게 끌어안아 주는 사람이 진실로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고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다. 학창 시절에는 부모님, 친구, 선생님을 통해 어렴풋이 그런 사랑을 받아와서 눈치채기 어려우나, 사회에 나와 낯선 타인과 어깨 부딪히며 지하철을 타다 보면 느낀다. 나의 밑바닥까지 온전히 사랑해 주는 사람은 정말로 희귀하다는 사실을.
다시 선배의 말을 떠올려 본다. “그렇게 하면 사랑받을 줄 알았어.” 이 말의 진짜 의미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사랑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아참, 한 가지 사실을 덧붙여 쓰는 걸 잊었다. 선배는 그 말을 마칠 때,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사랑받을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겠지. 가끔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나 자신을 몰아세우거나 혹독하게 대할 때, 곰곰이 곱씹어 본다. 사랑하는 사람은 어떠한 조건도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랑에는 조건이 없다는 금언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