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존재’를 부여한다는 뜻이다. 보이지 않는 신을 사랑한다거나 2D 세계에 속한 인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이 가능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인격을 전제해야 하며, 그 사람의 고유한 개성이나 특징을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 사랑하는 대상은 차이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녀의 오뚝한 코 때문에”, “그의 빛나는 눈동자 때문에.”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가장 건강하고 건전한 메시지는 “너는 너로서 존재한다”이다. 이상적인 사랑은 상대방을 부정하거나 과도하게 바꾸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가스라이팅이 사랑으로 인정받기 힘든 이유이자 사랑의 실현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변화를 싫어할뿐더러 나이가 들수록 점차 보수적으로 변하는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나’를 변화시키기보단 ‘너’를 변화시키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는 너로서 존재한다”는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 사랑은 애처로운 연민이나 비굴한 복종의 관계로만 남을 가능성이 높다.
사랑이 추구하는 것은 타인의 전격적인 수용뿐만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격적인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철저히 외모를 바꾸는 건 이미 상식이 된 이야기고, 혹자는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 새로운 페르소나를 창조하거나 경제적 모험을 감행하기도 한다. 타인을 받아들이기 위한 내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것. 이것이 사랑이 가진 혁명성이다.
타인을 타인으로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자기 변화와 나아가 자기-내어줌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사랑을 촉발하게 만든 한 사람의 인격과 개성의 차이점은 (역설적으로) 다시 사랑을 통해 마모되고 깎인다. 그 누구도 까칠하거나 엄격하거나 편협한 사람을 가리켜 “그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야”하고 말하지 않는다. ‘사랑이 많은 사람’의 기준은 대개 보편적이며, 둥글둥글하고 포용적인 사람을 가리킨다. 이는 사랑이 가진 조각의 힘, 편집의 힘을 나타낸다. 사랑 이야기가 대개 비슷하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은 사랑의 혁명성 — 실천적이고 자발적인 자기 변화를 입증한다.
그러므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실천적인 혁명가이며 또한 마땅히 타인이 아닌 자기 혁명을 도모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너를 너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자신을 변모해야 한다. 그런데 이때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서 서로가 지켜주고자 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변모하고 있는 나’이다. 다시 말해, ‘변화하는 역동적인 자아’를 ‘변화하는 역동적인 상태’로 계속 존재하게끔 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의 혁명성은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자기 변화로서의 혁명, 끊임없이 변모하게 만드는 생동력으로서의 혁명.
사랑은 ‘나’를 변화시킨다. 동시에 ‘너’도 변화시킨다. 사랑이 끝나는 순간은 다름 아니라 혁명이 멈춘 순간이다. 상대방을 위해 자기 변화를 꾀하지 않을 때, 상대방을 위한 자기의 희생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을 때 사랑은 작별을 향해 달려간다. 우리는 노년기를 가리켜 ‘죽어간다’고 말하지만, 유년기의 아이에게는 ‘성장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성장하지 않은 사랑은 죽어갈 따름이다. 끊임없는 성장과 변화. 사랑의 혁명성은 그러므로 사랑의 생명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