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준유 Oct 06. 2023

보편적인 사랑의 재발명

 한 번이라도 소개팅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알고 있는 몇 가지 공식이 있다. ‘세 번 만났으면 그다음 만날 때는 마음을 정해야 한다.’, ‘상대가 마음에 들어 한다는 증거는 카톡 답장 시간과 횟수다.’, ‘식사 후 카페로 가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등. 물론 이런 공식을 이야기할 땐 이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말이야.”


 공식은 비단 소개팅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겨우(혹은 쉽사리) 상대방의 번호를 딴 이들, 작은 모임에서 만나 연락처를 주고받은 이들, 어색한 만남 끝에 조금 친해진 이들 사이에도 비슷한 공식이 적용된다. 살면서 한 번도 연애를 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연애 상담만큼은 잘할 수 있는 까닭이다. 훈수 두기는 쉽다. 가이드라인만 알고 있다면. 


 우여곡절 끝에 그러나 다른 이들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 연인이 된 이들은 또한 비슷한 방식으로 사랑을 나눈다. 선물을 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서로를 만지고, 끝내 같은 잠자리에서 잔다. 이른바 ‘보편적인 사랑’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남들처럼 연애하고, 남들처럼 사랑한다.” 아무리 많은 이들이 사랑에 정답이 없다고 강조해도 보편적이지 않은 사랑은 낯설고 기이한 무엇으로 여겨질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 우리 세대의 보편적인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아만다’에서 ‘듀오’까지라고 할 수 있다. 혼인율이 감소하는 요즈음, 마치 시대에 역행하듯 소개팅 앱 및 결혼정보회사가 급성장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징후다. 직관적으로 둘은 매우 닮았는데, 바로 모든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된다는 점이다. 앞서 말한 소개팅의 경우보다도 더.


 직업, 연봉, 나이, 재산, 학벌, 심지어 외모까지 등급을 매기는 사랑 플랫폼은 우리 시대의 사랑의 보편성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상대방을 속속들이 알고야 말겠다는 욕망이자 상대방을 투명하게 벗기겠다는 욕망이다. 그것은 계기적 사건 없이 객관적 조건으로 만나겠다는 욕망이자 실패 없는 사랑을 하겠다는 욕망이다. 이를테면 안만추, 곧 ‘안전한 만남 추구’이다. 


 안전한 사랑에 대한 추구는 경제적인 문제 또는 세대의 경향성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경제적 번영이 끝나고 저성장 늪에 빠진 시대, 사랑만큼이라도 안정적으로 하고 싶다는 것 아니냐, 혹은 요즘 세대가 이기적인 세대라서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그런데 저성장의 늪에 빠졌다고 해도 이미 경제적 번영을 이룬 상태에서 안전한 사랑을 추구한다는 사실은 좀 모순적이다. 재력이 부족한 이들이 모험을 겁내지, 재력이 충분한 이들은 겁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이는 세대의 경향성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문제다. 그렇게 해석할 경우 남는 게 별로 없기도 하고. 그 대신 체제, 즉 정치적인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


 요즘 세대의 ‘사랑’이라는 낱말의 정치적 변화를 살펴보면, ‘정치성’이 실종됐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이 어떻게 정치성을 가질 수 있냐고? 하지만 사랑은 처음 등장할 때부터 정치적이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나는 이제 러브를 하고 싶소." 아직 ‘사랑’이라든가 ‘연애’라는 말이 생소하던 시절, ‘흠모하다’, ‘연정을 품다’ 따위가 더 익숙하던 시절에 “러브를 하고 싶다”는 말은 그 자체로 혁명적인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가문과 국가를 초월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의 개념은 어떠한가? 바울은 말한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민족, 계급, 성별이 엄격히 구분되던 시대에 바울은 만인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했다. 프랑스의 68혁명은 좀 더 노골적이다. 그들은 “금지를 금지하라!”며 자유로운 연애를 기치로 시위했다. 그들에게 사랑의 해방은 곧 정치의 해방이었다. 사랑은 결코 정치와 무관하지 않다.


 솔직하게 말해, 이제 사랑은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 어떠한 체제 전복도 시도하지 않고, 어떠한 정치적 의미도 갖지 않으며, 어떠한 사회 구조 변화도 야기하지 않는다. 모태 솔로라는 신조어까지 사용하며 연애 곧 보편적인 사랑을 즐기지 않는 이들을 조롱하는 시대, 연애를 하는 것은 그저 ‘정상인’이 되는 과정에 불과하다. 연애를 잘하는 사람은, 현 체제와 현 사회에 잘 적응하고 순응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위험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사랑과 위험에 공통으로 사용되는 동사는 ‘빠져듦’이다. 이것은 자신도 모르게 어딘가에 끌려간다는 뜻이며, 일단 한번 빠져들면 극복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위험 없는 안전한 사랑, 어떠한 정치성도 없는 사랑은 좋게 봐야 계약에 불과하다. 그러니 현재의 보편적인 사랑이 넘쳐나는 지금 시대는 이렇게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 계약의 시대 혹은 연애 과학의 시대라고.


 “사랑은 재발명되어야 한다.” 프랑스 시인 아르튀르 랭보가 한 말이다. 발명이 아니라 재발명이라고 한 까닭은, 발명에서마저도 사랑이 실종될 가능성을 염려했기 때문이 아닐까? 넘쳐나지만 결국 비슷한 사랑 이야기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사랑을 재발명해야 한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의 삶에 어떠한 함의를 주고 있는지, 나아가 어떠한 정치적 의미를 띠고 있는지. 사랑은 언제나 재발명되어야 한다. 


@BingImageCreator #사랑_발명_연인


이전 13화 사랑이 가진 혁명성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