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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유 Oct 06. 2023

사랑의 계절이 지나면


 사랑의 시작은 봄과 같다. 따뜻하게 부는 바람, 예쁘게 피는 꽃, 포근한 날씨, 화사하게 차려입은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 그러니 봄을 사랑의 계절로 표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잠깐 찬 바람이 불더라도 곧 따뜻해질 거라는 믿음으로 귀덮개와 목도리를 장롱 안으로 집어넣는 계절. 겹겹이 쌓였던 옷들이 조금씩 가벼워지듯 약간이나마 남아 있던 어색하고 불편한 마음들이 스르륵 풀린다.


 사랑이 전개될수록 여름에 가까워진다. 따뜻함과 쌀쌀함이 공존했던 봄과는 달리, 이제는 뜨거운 기운만이 올라온다. 그 뜨거움은 때론 짜증과 다툼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편함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봄에는 ‘가디건이라도 걸칠까? 핫팩을 챙기지 않아도 괜찮으려나?’ 와 같은 불편한 고민이 여전히 남아있지만, 여름에는 그저 시원한 반소매와 반바지, 슬리퍼만 신어도 외출할 수 있으니. 그토록 바라던 따뜻한 날들이 매일의 날씨가 되어 약간의 권태로움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여름은 서로에게 가장 자유롭고 편안할 수 있는 계절이 된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 사랑이라는 계절의 가을은 분기점이 된다. 고개를 숙이는 벼처럼, 여러 색깔로 물드는 단풍처럼 어떤 사랑은 더욱 깊고 겸손한 사랑으로 결실을 거두기도 하지만, 어떤 사랑은 변하는 색깔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별하기도 한다. 초록빛 풍경이 갑자기 노랑과 빨강으로 물드니, 마치 사랑이 변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애초에 사랑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계절의 변화가 자연스러운 일이듯, 설레거나 격정적이거나 편하기만 했던 사랑이 지나갔을 뿐이다. 쓸쓸하거나 쌀쌀함이 느껴지는 계절이지만, 가을만큼 높고 맑은 하늘을, 복잡다단한 열매와 잎들을, 고상한 커피의 향을 느낄 수 있는 계절도 없다. 깊음 혹은 높음, 가을에 이르러서야 사랑은 더욱 깊어지고 높아진다.


 겨울은 사랑이 깊은 잠에 빠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계절이다. 여름의 뜨거움이나 봄의 포근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직 추위만이 남으며 겨울잠에 빠진 웅크린 곰처럼 자신을 살찌운다. 그래서 어떤 사랑하는 이들은 겨울이 서로에 대한 사랑이 식는 계절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분명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겨울의 추위가 있어야만 따뜻함의 소중함을 알 수 있다. 겨울의 이른 어둠이 있어야만 주황빛 조명의 안락함을 알 수 있다. 추위와 어둠, 눈보라는 사랑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을 남기고 모두 제거한다. 설렘도, 격정도, 고상함도 차갑게 얼어붙은 손을 녹일 수는 없다. 사람을 녹이는 것은 사랑하는 이의 맞잡은 손이다. 겨울이 아니고서는 한 손에 잡히는 그 작은 따스함을 결코 알 길이 없다.


 예상보다 겨울이 길어질지도 모른다. 혹은 봄이 겨울만큼 춥거나, 반짝 지나가 버릴지도 모른다. 또다시 찾아온 봄에는 더 이상 설렘이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해가 지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평범한 진리를 기억하라. 한 해가 지나면 새싹이 움트고 겨우내 잠들었던 동물들이 기지개를 켠다. 한 해의 고단함, 한 해의 수고가 느껴지는 봄은, 한 해 전 느꼈던 봄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한 해 전 느꼈던 봄의 생동감과 풍성함은 겨울에 의해 더욱 생동하고 풍성한 것으로 완성된다.


 나이가 들수록 사랑의 계절은 점점 공존하게 된다. 봄의 설렘과 싱그러움, 여름의 열정과 뜨거움, 가을의 고상함과 너그러움, 겨울의 따뜻함과 소중함. 어느 한 계절에만 머무는 미숙한 사랑 대신, 시간과 경험의 마법이 어느 때고 사계절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설레는 연인, 편안한 친구, 좋은 선생님, 무던한 가족. 한 해를 모두 겪어야 사계절이 공존하는 사랑을 이룰 수 있다. 그러니 다가올 혹은 지나가는 사랑의 계절을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성숙한 사랑을 위해서는 모든 사랑의 계절을 지나가야 한다.


@BingImageCreator #사계절_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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