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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유 Oct 11. 2023

당신의 슬픔까지도 사랑하기란

 웃으면서 대화하는 건 누구와도 가능한 일.

 힘들어할 때 웃겨주는 것도 조금만 노력하면 돼.

 슬퍼할 때 진심으로 위로하는 일도 어렵진 않지만,

 당신의 슬픔까지 사랑하기란 정말로 어렵더라.


 많은 연인이 헤어지는 이유 중 하나로 ‘공감’을 꼽는다. “결국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더라고.” 그런데 이 말은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내 마음’ 중에서도 특별히 어떤 부분을 알아주지 못했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연인에게 생긴 기쁜 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기란 어렵지 않다. 시험에 합격하거나, 자격증을 취득하거나, 취업에 성공하거나, 입시를 통과하거나, 이벤트에 당첨되거나, 혹은 처음 시도한 쿠키 만들기에 성공하거나. 연인에게 중요한 일은 곧 나에게도 중요한 일이며, 그에게 기쁜 일은 곧 나에게도 기쁜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연인에게 생긴 나쁜 일을 진심으로 위로해 주는 일 역시 그렇게 어렵진 않다. 친애하던 사람과 멀어지거나, 가족 또는 친인척과 사별하거나, 아끼던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직장에서 힘든 일을 겪었거나, 시험에서 떨어지거나. 역시 연인이 당한 나쁜 일은 나에게도 나쁜 일이므로, 그의 마음에 공감해 줄 수 있다. 아니면 적어도, 공감해 주는 척이라도 하는 것.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다”라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기쁨을 함께 나누고, 슬픔을 위로해 주는 연인이거늘 무엇을 더 바라는 것이냐는 말이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그가 말하는 ‘마음’이 실은 ‘슬픔’이고, ‘알아준다’는 사실 ‘사랑한다’는 의미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즉, “내 마음을 몰라주지 못해서 서럽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사실 “(사랑하는) 연인이 자신의 슬픔을 사랑해 주지 못해서 서럽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기쁜 일, 기쁨의 속성이 보편성, 일반성, 대중성을 지녔다면, 슬픈 일, 슬픔은 개별성, 특수성, 희소성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슬픔이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은 자신이 갖고 있는 개성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과 비슷하다.


 기쁜 일은 대개 ‘성취’로부터 비롯된다. 성취의 결과는  합격증이나 사원증, 혹은 쿠키와 같이 물성(物性)을 지닌 경우가 많고, 그렇기에 자기 경험을 떠올려 얼마든지 연인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다. 물성을 지닌 것은 대체해서 생각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가령, 자격증을 취득한 연인과 함께 기뻐하기 위해서는 오래전 자신이 시험에 합격했던 일을 떠올리면 된다. 이처럼 연인에게 일어난 기쁜 일을 사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반면, 연인의 슬픔을 사랑해 주기란 몹시 어렵다.


 앞서 말했듯이, 연인의 슬픔을 위로하는 건 쉽다. 하지만 위로한다는 말은 그 자체로 그 감정과 일정한 거리를 전제한다. 즉, 연인의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고, 바로 그렇기에 연인의 슬픔을 사랑하지 못한다. 기쁨과 달리, 어느 한 사람이 느끼는 슬픔은 세계에 대한 인식과 감각을 바탕으로 생겨난다. 여기에는 어떠한 물성이 존재하기가 힘들다. ‘슬픈 일’을 떠올려 보라. 죽음, 이별, 아픔, 좌절, 망각……. 무엇 하나 구체화하거나 물체화하기 어렵다. 슬픔이란 이토록 추상적이니, 갑작스레 기습해 오는 슬픔을 어떻게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단지 그것을 ‘느낄’ 뿐인데.


 꼭 누군가의 죽음이나 갑작스러운 이별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종류의 슬픔은 일상에서 만연하게 일어난다. 가령 아끼던 옷이 훼손되거나, 오랫동안 간직하던 인형이 망가졌을 때를 떠올려 보라. 누군가는, 특히 자신의 슬픔을 사랑하지 못하는 연인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 더 사면 되지, 뭐 어때.” 그러나 훼손된 옷, 망가진 인형은 손쉽게 다른 옷 또는 인형과 대체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것들은 연인과 특별한 날을 즐기기 위해 애써 고민했던 흔적이나 오랫동안 함께한 추억이 깃든 물건이며, 훼손되거나 망가진 순간 발생하는 슬픔은 단순히 대체가능한 물건이 훼손되었거나 망가졌을 때 느끼는 슬픔과는 결이 다르다. 그러한 슬픔은 감히 이름 붙일 수 없는 슬픔이며, “아끼던 건데…….”라는 탄식 외에는 감히 언어화하기 어렵다. 그러니 이 슬픔을 사랑해 주지 않는다면, 혹은 못 한다면, 공감받지 못한다는 기분이 들 수밖에. 


 물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이런 종류의 슬픔을 정확하게 사랑하기란 너무나 어렵다. 각자의 연애 경험에 비추어 봐도 그럴 것이다. 나에게는 나만 느낄 수 있는 ― 그러나 말로 표현하기는 힘든 슬픔이 있고, 당신에게도 당신만 느끼는, 그러나 말로 표현하기는 힘든 슬픔이 있을 테다. 그것은 내가 표현해 줄 수도 없고, 당신 또한 내가 표현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연인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알 수 없는 당신의 슬픔을 그저 껴안는 일, 사랑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 슬픔을 느끼고 있으니까. 당신이 그 슬픔을 사랑하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상대방에게 진정으로 공감하고 싶다면, 우선 그 사람이 사랑하고 있는 ‘슬픔’이 무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슬픔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연인은 ‘공감’ 받는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으리라. 연인은 서로의 슬픔을 조금 더 깊이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


@BingImageCreator #병_안에_담긴_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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