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에서 조사는 대개 비슷한 뜻을 취하는 낱말로 취급된다. '나는
배고프다.'와 '내가 배고프다.'의 차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에서는 미묘한 조사의 차이가 그 관계를 환희로 이끌기도, 파국으로 이끌기도 한다. 특히나 서로 사랑하는 연인 관계라면 더욱이. 가령 ‘사랑하는 사람’과 ‘너’라는 말의 조합을 살펴보자.
“사랑하는 사람이 너였어.”
“사랑하는 사람은 너였어.”
조사 하나만 바뀌었는데 느낌이 사뭇 다르다. 첫 번째 문장은 깨달음의 성격이 묻어나 있다. 여러 사람을 만나며 호감을 품었지만, 몇 번이고 생각해 본 결과 ― “사랑하는 사람이 너였어.” 반면 두 번째 문장은 약간은 후회하는 의미가 섞여 있다. 너와 헤어지고 여러 사람을 만나봤지만 결국 알게 된 게 ― “사랑하는 사람은 너였어.”
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말을 한다. 특히나 연인 간에는, 대화가 부족해도 문제지만 대화가 너무 많아도 문제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끊임없이 대화하다 보면 결국 미묘한 생각 차이가 조금씩 드러나기 때문이다. 분명 만나기 전에는, 혹은 초반까지는 비슷한 결인 것 같았는데, 막상 삶을 이어 나가다 보면 조금씩 다른 부분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미묘한 문법의 차이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사랑은 일종의 환상이다. 그 사람의 진면목까지 보고 난 뒤에 사랑을 시작하진 않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 사람에게 없는 것이 있다고 가정하며 사랑을 시작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 사람이 줄 수 없는 것을 기대하며 사랑을 시작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랑을 한결같이 유지하려면 반드시 그 환상을 유지해야 하는데, 콩깍지가 벗겨진다는 말처럼, 환상이 무너지는 날은 반드시 찾아온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연인 사이의 ‘사랑의 언어학’을 정립할 차례이다.
사랑의 환상이 끝이 날 때, 그리하여 미묘한 사랑의 문법 차이가 느껴지기 시작할 때, 우리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놓인다. 이 사람을 떠나 비슷한 문법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나든지, 이 사람이 갖고 있는 사랑의 문법을 배우든지. 당연하지만 전자는 자유로움을, 후자는 고통을 전제한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외국인과 헤어지는 게 그의 언어를 배우는 것보다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다만 전자를 선택하기 전에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연애를 하는 사람의 문법은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그리하여 지구상에 있는 70억 명의 사랑의 문법은 70억 개라는 사실이다. 누구나 자신의 문법을 구사하기 때문에, 사랑의 문법이 완벽하게 들어맞는 사람은 결코 존재할 리 없다. 우리가 보고, 배우고, 느낀 사랑의 문법이 모두 제각각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하기야 우리는 일상생활에서조차도 자주 쓰는 낱말과 문장이 각각 다르지 않은가. 미묘한 사랑의 문법 차이는 고사하고, 업무 중에도 소통이 안 돼서 서로 다투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따라서 서로의 사랑의 문법을 배우기가 어렵다는 사실은 문제가 될 수 없다. 다만 헛된 소망을 품고 언젠가 만날 ‘동향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 이것이 문제이고 영원한 고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