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해야 한다. 우리 모두 사랑에 대해 일정한 환상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혹은 어쩌면 사랑의 본질이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나는 너를 모르고, 너는 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우리가 서로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내 이상형은 키가 작고 머리가 긴 사람이야.” 그렇게 말한 사람이 장신의 단발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건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항상 낭만적이다. 사랑에 빠지는 사람은 타인에 대해 제멋대로 평가하고, 꿈을 꾸는 사람이다. 로맨틱하기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니라 사랑은 환상이기 때문에 로맨틱하게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환상을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네 모습은 내가 바라는 너의 모습이고, 또는, 내가 바라던 나의 모습이다.
그렇기에 사랑의 진실은 늘 추악하다. 쏜 화살이 과녁을 비켜 나간다. “너는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어.” 권태는 이 말의 다른 표현일 따름이다. 새로운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은 다른 누군가에게 또 다른 환상을 대입하고 싶은 사람일 뿐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결핍된 기억의 반복이거나, 불안의 참신한 표현이거나, 나르시시즘의 이면일 뿐이다. 여러 사람을 만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은 한 사람일 뿐이다. 그는 환상 속에 존재하는, 절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일 따름이다.
정말로 진실한 사랑을 추구한다고 말하고 싶다면 낭만적 사랑에서 진리의 사랑으로 이행해야 한다. 권태를 껴안는 것이다. 지루함을 즐기는 것이다. 탈은폐되어 시시해진, 그런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다. 여기에 필요한 건 정의나 애정 따위가 아니다. “다음에는 분명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될 거야.” 이는 앞서 말했듯이 환상을 반복하는 일에 불과하다. 진정한 용기 있는 사람은, 그래서 진리의 사랑으로 이행하고 싶은 사람은 고백한다. “이렇게 시시한 사람이라니, 나의 진짜 연인임이 분명하군.”
모든 로맨스 소설과 사랑에 관한 드라마는 허구이다. 독자와 시청자들은 그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서사에 몰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오직 허구만이 낭만적 사랑을 가능하게 한다는 뜻이다. 환상이 없다면 사랑도 없듯이, 허구 없이는 낭만적 사랑도 없다. 바람둥이가 연인이 끊기지 않는 까닭은 그의 언어는 모두 허구로 이루어져 있기에, 끊임없이 낭만적 사랑을 이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결코 진리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그는 현실에 발을 디디지 못한 채 소설 속에서만 살다 죽는다.
낭만을 붙잡을 것인가? 진리를 붙잡을 것인가? 매트릭스의 두 알약이다. 낭만은 아름답고 풍요로우며 즐거운 일이 가득하다. 진리는 대개 괴롭고 고통스러우며 고뇌가 가득하다. 그런데 낭만에는 없는 것이 딱 한 가지 있으니, 바로 ‘진리’이다. 낭만적인 세계에는 거짓말, 허구, 꿈만이 넘쳐난다.
영원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애초에 한 번의 사랑조차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용기를 갖고 욕망 — 허구를 향한 뒤쫓음의 반복 — 을 이겨낸 뒤에야 진리의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행복을 담보해 주지 않는 사랑을, 기꺼이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쾌락원칙에 중독된 자아는 행복을 보증해 주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보단 차라리 (일시적인) 허구에 만족하며 산다. 정신분석과 철학, 그리고 신학만이 용기를 주며 진리를 말한다. 아무리 고난스럽더라도 진리이기 때문에 택해야 한다고. 사랑은 절대 달콤하지만은 않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