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유일한 태교는 발레였다.
나는 임신소식을 듣고 어떤 태교를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또 꽤나 잘 그린다는 소리를 들었던지라 당시 유행하던 컬러링북과 색연필을 샀다. 예쁜 색을 골라 색칠하는 것 자체가 힐링이 되고 결과물을 보면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곧 어깨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이내 곧 컬러링을 그만두고 발레를 꾸준히 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주변의 만류도 있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어떻게 발레를 하냐
아이한테 위험하지는 않냐
등 등
하지만 발레는 나의 삶의 일부였고 계속하던 발레를 하는 것이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임산부 요가나 다른 운동을 하는 것보다 득이 더 많을 것이라 자신했다. 게다가 일을 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발레에서 해결해 왔기에 발레는 나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해방구였다.
임신이 확실시되고 운동시간이 조금은 뜸해졌다. 흔히들 안전하다고 하는 삼 개월 차가 되었고 발레학원에 알렸다. 이제는 터닝 혹은 그링주떼와 같은 과격한 동작을 따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전포고였다.
달라졌다. 모든 것이.
발레를 같이 하던 동료들은 나에게 발레바에 손을 대지도 못하게 했다. 학원의 발레바는 상당한 무게라 보통 두 사람이 옮기곤 했다. 혼자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무게였다. 임신 소식을 알리자 나는 바워크가 끝나면 바를 나르는 것에서 제외되었다. 대화할 상대도 많이 생겼다. 보통 발레수업을 하고 땡 하면 집에 가는 나였기에 소수를 제외하고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적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나를 걱정해 주었고 발레를 할 때도 안절부절 잘하나 넘어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 한 얼굴로 바라봐 주기도 했다.
발레리나. 만삭사진.
내가 맨 처음 만삭의 발레리나를 본 것은 발레 뷰티풀이라는 책을 낸 Mary Helen Bowers였다. 발레 뷰티풀이라는 책도 내가 발레를 시작하게 된 계기 중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그녀의 만삭사진은 그 어떤 만삭사진보다 아름다웠다. 실력의 한계로 진정한 발레리나의 프로페셔널한 사진을 찍을 수 없었지만 남편과 토슈즈와 발레 레오타드를 준비하여 스튜디오로 향했다. 아이에게도 분명 좋은 추억거리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더불어 매주 남편은 나를 옆으로 세워놓고 임신 주수별로 사진을 찍어주었는데 간혹 발레에 다녀온 후 찍은 주수 사진 또한 추억이 되었다.
같이해요. 내 아이도.
아들이 다니는 유치원에는 발레 클래스가 있다. 발레 클래스 때문에 유치원을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아들과 가끔 플리에 턴듀 그랑 바뜨망을 얘기하는 것은 너무나 즐겁다. 스포츠를 더 좋아해서 발레보다 럭비 크리켓을 좋아하지만 아이와 함께 또 하나의 공통된 관심사를 이야기할 수 있어 좋다. 키위야 키위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했어~라고 얘기하면 웃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엄마 나 엄마가 뱅글뱅글 돌아서 어지러웠잖아~”
빨랐었다. 회복마저.
나는 발레를 출산 거의 직전까지 했다. 그리고 출산 후에는 한달이 지나고 발레학원에 다시 나갔다. 제왕절개를 했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 회복이 빨랐다. 오히려 조리원이 너무나도 답답해서 빨리 나왔다. 조리원에 어른들은 나를 보며 애낳은 사람같지 않다고 말했다. 붓기도 거의 없고 배도 빨리 들어갔기 때문이다. 다 발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행복했다. 태교발레.
태교는 임산부 먼저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탯줄로 연결된 아이는 엄마의 감정을 느낀다고 한다. 음악을 듣고 뜨개질을 하고 전통적인 태교방식은 모두 마음을 다스리고 행복하고 안정된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그랬다. 발레를 하면 안정적이 되었다. 행복했다. 클래식 선율을 들을 수 있고 아름다운 동작을 따라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감히 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되는 그런 춤을 추는 것은 나를 행복하게 했다. 발레 덕분에 나는 임신기간 내내 정서적으로 안정되었었고 출산에 대한 자신감까지 얻었다. (비록 응급으로 제왕절개를 했지만).
세상에는 수많은 태교방법이 있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운동을 하고, 맛집을 찾아다니거나, 태교여행을 하고 한다. 만약 누군가 임신을 준비한다고 한다면 나는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다.
나를 그 누구보다 행복한 임산부로 만들어
준 것은 바로 발레였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