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조용한 다짐 하나.....
언제부터였을까?
회사 출퇴근 분위기가 바뀌어있었다.
처음 입사했을 때는,
일찍 퇴근하는 것 자체가 눈치 보였다.
출퇴근 거리가 상당했기 때문에 6시 칼퇴근하더라도
집에가면 8시를 넘길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신혼초에 매일 야근을 하는 것은 집에서도 눈치보이는 일이었다.
결국, 둘 중 하나는 선택해야만 했다.
회사에서의 눈치냐.....
집에서의 눈치냐...
다행스럽게도 일부 여직원들은 6시만 되면 인사도 없이 퇴근해버렸다.
나도 스멀스멀 그들 틈새에 끼어 조용히 퇴근하고 있었다.
팀장님에게 눈치도 보였지만,
남아서 일한다고 능률도 오르지 않았고,
오히려 얼른 가서 밥 먹고 좀 쉬다가
못다한 일을 하고 자는게 훨씬 좋았고 편했다.
그러고 얼마 뒤 경력직 남자 직원들이 새롭게 들어왔다.
그들과 나의 호흡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최상이었다고 해야하나?
이직을 한 지금도 그들과 한달에
한번씩 만나서 술한잔 하는 사이인 걸 보면,
그들에게도 내가 나쁘진 않았던 듯 싶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확실히 그들이 오고 나서 회사의 분위기는 급격히 달라지고 있었다.
매일 같이 야근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일찍 퇴근하기 시작했다.
나는 뭐 처음부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칼퇴근을 했었기 때문에...
익숙한 일이었지만,
어쩌다 일 때문에 늦게 퇴근할 때면,
빈 책상이 너무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리사들의 퇴근 시간은 매일 같이 똑같았다.
새벽에도 보내진 메일을 보면 답답했었다.
새벽에도 검토 메일을 보내는 것을 보면,
내 할일을 미룰 수 없었다.
어떻게든 빨리 하고 보내야만 했다.
기일을 지켜야하는 업이긴 했지만,
날짜에 쫓기는 삶은 생각보다 훨씬 고통스러웠다.
그렇게....하루를 버티고 퇴근한 어느 날 저녁부터,
나는 조용히 운동화 끈을 묶고 동네를 걷기 시작했다.
그때는 서울 끝자락, 은평구로 이사온지 1년쯤 되는 어느 날이었다.
첫째를 출산하기까지 불광천 한번 제대로 걷지 않았었는데....
나 스스로가 길을 걷게 되기까지 은근 시간이 많이도 흘렀다.
불광천을 걷다 보니 새삼 서울의 길거리가 너무도 좋았다.
집에서 조금만 나오면, 이런 이쁜 산책길이 마련되어 있다니...
이어폰을 끼고, 걷고 또 걸었다.
30분쯤 걸었을까?
저 멀리 처가집 초입부가 보이기 시작했다.
고민이 되었다.
계속 걸을까? 돌아갈까?
조금 더 가자니 돌아갈 일이 걱정이었고,
그대로 돌아가려니 뭔가 이내 아쉬웠다.
그날 따라 내가 미쳤었나보다.
월드컵경기장쪽으로 발을 더 내딛었다.
간만에 오래 걸으니 다리가 저려왔다.
체중도 많이 나가다보니...
왠지 무릎도 시큰하고, 발목도 좀 부은 느낌이었다.
증산역을 좀 지났을 때,
불광천에 설치된 벤치에 앉아 하늘을 보았다.
잘 보이지 않았던 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귀에 꽂고 있었던 이어폰 속으로 들려오던
음악소리가 분위기를 묘하게 만들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할까?'
문득, 일하는 현재가 고마우면서도 미래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남몰래 그렇게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제자리에 멈출수는 없었다.
그날 이후부터였다.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
너무도 뻔한 자기계발서들이었지만,
퇴근 길 책 한권 들고 읽는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미래가 보장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매일 반복되는 업무에 연일 지쳐가고 있었다.
특허 쓰고, 과제하고, 퇴근해서 아이 보고,
주말이면 늘어져 낮잠자고...
집 값도 비싸다는 이유로 전세살고 있던 시절인데.
아파트 분양가는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내 월급은 몇 년간 제자리인데....
어느 세월에 내 집 마련이 가능할까?
그러면 내 몸 값을 올려야 하는데~ 방법은 뭐 없나?
그러다 문득, 옛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변리사 시험이 있었지.”
공대 출신이고, 특허도 써봤고, 기술 이해도 나쁘지 않으니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게다가 공대 출신 엔지니어들이 은퇴 후 가장 하고 싶어하는 직업 1위가 변리사라는 말도 있었기에,
나 역시 언젠가 꼭 도전하고 싶었던 목표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바로 눈앞에 있는 현실이 있었다.
하루에도 쏟아지는 일감,
새벽같이 출근하고, 주말에도 집에서 일하고,
그리고 녹초가 된 채 쓰러져 자는 내 모습.
변리사는 단순히 공부만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시험에 붙는다고 해도, 이후의 커리어는 영업력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그당시 영업력에는 학벌과 인맥이 중요하게 작용했고,
그로 인해 실제 사건 수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나처럼 평범한 대학 졸업자에게는 시작부터 벽이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만인의 자격증...
바로 공인중개사!!!!!!
그전까진 크게 관심 없던 자격증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날은 달랐다.
학벌, 경력, 인맥, 그 무엇과도 상관없이 스스로의 영업력으로 승부할 수 있는 세계.
게다가 집과 부동산에 대한 관심은 꾸준했고,
언젠가 내 집 마련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노후까지 이어갈 수 있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이거다 싶었다.
나름 공부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고,
아줌마들의 고시라고 불리는 공인중개사 시험에 돈을 쓰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난 바로 독학을 결심했다.
책만 구매한 뒤....
바로 무료 강의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문제는, 시작 시점이 남들보다 꽤 늦었다는 것 뿐이었다.
그때 처음 알았다.
공인중개사 시험은 1년에 딱 한번이었고,
하루에 1차와 2차를 모두 시험본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1년에 한번 있는 시험은 늘 10월의 마지막주 토요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처음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은게 3월이었으니...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6개월정도 있었던 것이다.
무료 강의라 만만하게 봤지만, 현실은 달랐다.
무료 강의는 순수 강의시간만 하루 3.5시간 정도 진행되었다.
그것도 매일매일...
내가 예상했던 시간 범주를 훨씬 많이 벗어났다.
칼퇴하고 아이랑 놀아주다 잠들면,
부엌에 가서 설거지를 하고,
뒷정리를 마친 다음,
조용히 컴퓨터를 켜고 휴식시간을 포함해 거진 4시간짜리 강의를 재생했다.
복습은 사치였다. 일단 따라가기라도 해야 했다.
민법, 부동산학개론… 모르는 단어 천지였다.
강의 속도는 빠르고, 이해는 느리고, 노트는 늘어가는데 머리는 점점 복잡해졌다.
공부는 점점 버거워졌고,
피로가 쌓인 어느 날 밤엔 책상 앞에 앉았다가
그대로 의자에 기대 쓰러져 잠들었다.
몸도 힘들었지만, 마음도 지쳤다.
주말엔 공부도 좀 쉬고 싶기도 했고,
복습은 전혀 하지 않은채 6월 모의고사를 봤다.
시험장에서 나오면서
많이 당황했다.
강의는 들을만 했는데,,,, 점수는 왜 이 모양이지?
부동산학개론을 제외한 나머지 과목은 모두 과락...
처참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7월부터 주말에도 공부를 선택해야했다.
아이가 태어난지 100일이 좀 지나고 나서야 조금씩 친해졌는데
다시 사이가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주말 아침 7시 도서관 앞이다.
나름 일찍 갔다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줄을 서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뭐하는 사람들이지??
줄서서 들어가 보니 명당 공부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도서관 터주대감들이다.
쉬면서 둘러보니... 절반 이상이 공인중개사 수험생이고,
나머지는 공무원 준비생이었다.
뭔가 동병상련의 마음도 느껴지고....
열공 안할수가 없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8월 끝자락이다.
모의고사를 보지만 여전히 점수는 개판이었다.
평일 저녁도 강의만 들어서는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았다.
9월을 앞두고
독서실을 계약했다.
퇴근하고 집에도 안가고 독서실로 직행했다.
저녁은 간단하게 떼우고,
빠르게 강의를 듣고, 문제를 풀었다.
12시가 넘어갈 때 쯤 퇴실하고,
집으로 들어가 누웠다가 새벽 6시엔 회사로 출근했다.
본격적으로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기인 추석 연휴가 다가왔다.
처가집에 간 첫날..
나는 쓰러졌다.
열이 떨어지질 않았다.
내가 세웠던 공부 계획은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젠장..... 이렇게 누워만 있으면 안되는데...'
마음은 일어나고 싶었지만,
일어날 수가 없었다.
스트레스가 심했다.
시험을 포기해야하나 싶었다.
사람이 죽지는 말라고,
연휴가 끝나고 나니 더 이상 아프지는 않았다.
밀린 공부를 해야했고,
밀린 일을 해야했다.
그렇게 10월을 마주했다.
특허 사무소의 특성상 3분기부터 일이 몰리기 시작한다.
이번 여름은 휴가도 못갔는데....
10월 시험을 앞두고 3일간 연차를 소진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공부가 잘될리가 없었다.
막판 모의고사 결과도 망했다.
'이거 떨어지면 어쩌지?'라는 생각만 가득했다.
드디어 시험 당일...
새벽같이 시험장에 갔다.
긴장되었고, 암기한 것들이 소멸될까 두려워...
빠르게 훑어내려갔다.
1차 시험이 끝나고 집에 가고 싶었다.
2차가 의미없어 보였다.
다들 나가면서 욕을 시원하게 쏟아붓는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2차 준비해야하는 상황이라 그 순간도 사치처럼 느껴졌다.
추석때 못한 공부가 한스러웠다.
그때 마무리만 잘 했어도....
이렇게 긴장되지 않았을텐데.
2차까지 마친 그 날 저녁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이번에 시험 떨어지면 깔끔하게 포기하자고.
그러고 가채점을 시작했다.
가채점을 하는 그 시간은 고요했다.
적막했고,
눈이 커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지?
생각보다 동그라미가 많다.
1차도 떨어진 줄 알았더만....
1차는 합격!
2차는 단 한과목만 과락....
순간, 이 점수들이 맞는 건가 싶었다.
아내는 웃으며 1년더 공부해보란다.
이제 남은 건 2차만 준비하면 되는데....
한번 공부해봤다고 자신감은 넘쳐났다.
그렇게 1년을 더 시험 준비를 하게 되었다.
1년동안 시험을 더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 인생을 달라지게 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동기들....
동기들 덕에 재미있게 시험 공부했고,
외롭지 않았고,
같이 합격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최종 합격하고, 둘째도 생겼다.
2018년부터는 내가 선택한 공부로,
뭔가 더 멋진 미래가 펼쳐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내 마음속 조용히 다짐하고,
한발 내딛기 시작했다.
다음 화 예고: “부동산 공부, 그리고 당첨된 청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