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스를 입고 달린다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 당신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요?

by 투명서재

드레스를 입고 달린다


한 줄 평 : 당신은 어느 얼굴을 하고 있을까요?


키 워 드 : 역할에 따른 가면


소개(출처 : 네이버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배우 문소리는 오늘도 며느리, 딸, 엄마, 아내 역할로 만취 상태다. 정작 맡고 싶은 배역의 러브콜은 끊긴 지 오래고, 일년에 작품 한 개도 겨우다. 게다가 자타공인 연기파 배우 타이틀도 십팔 년 차 중견 여배우로 교체된 판국. 트로피 개수 만큼은 메릴 스트립 부럽지 않은 그녀지만, 연기력과 매력 사이 자존감은 점점 흔들리기만 하는데... 연기는 완전 쩔지만, 매력은 대략 쫄리는 데뷔 십팔 년 차 배우 문소리 2017년, 어제는 날았고 오늘은 달리는 그녀의 자력갱생이 시작된다.





나는 아이가 만 두 돌이 지나자마자 시간제 일을 시작했다.

아이가 일곱 살이던 해에 저녁 7시부터 두 시간 동안 하는 일거리가 추가로 들어왔다. 시작이 저녁 7시부터니 그 전에 시어머니와 남편, 아이의 저녁을 차려놓고 집에서 나섰다. 가스레인지 위의 냄비와 프라이팬 위에서 무언가를 지지고 볶으며 정신없었다. 한창 퇴근 시간에 지하철과 버스 한 번씩 갈아타고 한 시간 정도면 도착하는 곳이었다. 어느 날 화장도 하지 않은 채 집에서 나왔는데도 버스 도착 시간까지 촉박했다.


지하철역 입구부터 버스 정류장까지 사력을 다해 뛰었다. 버스 안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출퇴근할 때 화장하거나 머리카락에 구르프 말고 있는 여성을 보면 진짜 바쁜가보다 싶었는데 그 날의 나는 민망함을 무릎쓰고 버스 의자에 앉자마자 거울 보며 비비크림을 바르고 급히 볼을 톡톡 때리고 있었다.


서둘러 도착한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몇 분 동안 엄마와 며느리 가면을 딱 벗고 파트타이머 가면을 쓴다. 두 시간만 일하고 떠나는 자리에서 오늘 반찬은 뭐였고, 시어머니가 집에 오시면 밥상차림에 신경 써야 한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최대한 여유 있는 척하고 사무실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 몸에서는 음식 냄새가 배고 소매 어딘가에는 김치 국물이 묻어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곳에서 1년 일하고 나서 받은 선물이 향수였으니 말 다 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역할에 따라 가면을 썼다 벗었다 반복한다. 나야 아주 평범한 사람이기에 엄마에서 워킹맘으로, 워킹맘에서 엄마로 변신은 어느 여성이든 수없이 겪는 일일 것이다. 베일에 싸여 가까이 있어도 먼 당신처럼 느껴지는 여배우라면 어떨까?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는 배우 문소리라는 사람을 여러 상황에서 다양한 각도로 다채롭게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문소리는 감독과 주연을 맡았다. 문소리도 일상에서는 엄마다. 어느 날 딸이 유치원 안 가겠다고 하자, “그럼 가지마!” 소리 지르는 할머니와 달리 “가야지, 왜 안 가?”라며 가라고 설득한다. 딸은 똑부러지게 말한다. “힘들면 쉬어야지.”


그런데 정작 문소리는 힘들어도 쉴 수 없다. 써야 할 가면이 너무 많다. 현실적인 워킹맘, 모녀관계에서. 문소리의 어머니가 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자 “엄마 연기하지 마.”라고 한다. 어머니가 늦게 귀가하는 딸에게 “연기하지 마!” 그런다. 우리에게 연기는 생활이자 생계 수단이다.


우리의 환상 속 여배우가 아니라 생활인으로서의 배우로 이미지가 깨지는 주제는 바로 돈이다. 문소리는 자신과 부모님의 비싼 치과 진료비 할인을 위해 병원 홍보 사진을 찍어야 하는 상황, 간호사들이 “원장님 잘 생겼어요!”한다. 역시 줄을 잘 서야 한다. 원장 역할 남자배우 외모를 비하하는 게 아니라, 여배우가 버젓이 옆에 있더라도 내 월급을 누가 주느냐가 더 중요하다. 문소리가 치과에서 홍보 사진을 찍고 나서 치과 건물 계단에서 어머니와 통화하는 장면, 은행에서 대출을 알아보는 장면은 현실적이다. 영화 속 요양원에 계신 시어머니도 실제 상황은 아니겠지만 참으로 적절한 시나리오였다고 생각한다. 시어머니가 건네는 5천만원 짜리 통장이 십원 짜리 동전으로 둔갑한 모순은 현실을 더 팍팍하게 한다.


영화의 묘미는 그것이 실제인지 가상인지 알 수 없는데 있다. 영화관 불이 켜지자마자 아 그것이 환상이었음을 잠에서 깨듯이 깬다. ‘여배우는 오늘도’는 현실인지 연기인지 헷갈리기에 영화의 묘미를 더한다. 문소리라는 배우의 자학 개그이자, 원 워먼 쇼다.


여성이 아내, 엄마, 며느리,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여배우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대한민국 현주소를 보여준다. 감독 문소리는 관객이 어느 지점에서 폭소할지를 잘 알고 있다. 감독이 설정해놓은 적절한 그 타이밍에 관객을 웃기고 울린다.


나름 매력있는 문소리는 화장 먹으라고 자기의 얼굴을 때리는 그 찰진 손에서, 매니저에게 앙탈 부리며 흘기는 눈초리에서, 순간 연기가 아닌 실제 웃음이 터져 나오는데 참으려 하는 표정에서, 논길을 달리다가 차에 돌아가며 운동선수처럼 뻐기는 어깨 짓과 발짓에서, 배우 문소리인지 평범한 문소리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어디까지 생활이고 어디까지 연기인지 잘 모르겠다.


여배우 생활의 달인, '나름 매력' 있는, 술을 줄이지 못하는, 윤복희의 여러분을 맛깔나게 부르는, 의리의 문소리, 작품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배우 입장에서 이렇게 창작할 수 있는 적극적이고 용감한 배우가 또 있을까? 마지막 3편에서 예술, 영화에 대한 고민이 느껴진다. 어떤 영화에 대한 ‘예술이다, 아니다’를 평가하기에는 창작자의 고민이 죽기 살기로 치열하다.


문소리가 인간적으로 정이 가는 한 감독의 장례식장에서 그 감독이 찍은 일상적인 풍경 예를 들어 바닷가, 날아가는 새들, 가족을 찍은 동영상을 보면서 엉엉 울던 장면이 있다.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당황스러웠다.


이 영화를 통해 배우로서 많은 역할을 짊어지고 사는 사람 '문소리'에 대한 애틋함과 안쓰러움이 있었다. 여성으로서 동질감과 측은지심, 여러 역할에 따라 가면을 바꾸는 것이 어지러웠다. 어느 삶이든 한 사람이 시소의 균형을 맞추려 들면 양발을 양쪽에 두고 중앙에 서 있어야 한다. 아무도 없는 시소가 180도 일자인 경우가 없다. 늘 어느 한쪽이 기울어져 있다.


우리도 역할에 따라 시소 한쪽이 올라가기도 다른 쪽이 내려가기도 한다. 중요한 건 어느 쪽에 무게가 실리든 기울기를 매 순간 알아차리고 그 위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 어느쪽이 기울지, 내가 떨어지지 않을지 긴장감을 즐기는 것이다. 어느 쪽이 치우치냐가 중요한 것보다 어느 역할이든 한껏 껴안아 그 속에서 의미와 즐거움을 찾아보면 어떨까?


문소리가 거울을 보며 화장 먹게 하고, 다시 거울 보며 화장을 지우게 하는 그 장면이 겹치면서 여러 가지 가면을 썼다 벗었다 하는 배우를 보면서 우리 사는 모습이 다 그러하지 않겠나 하는 위안 삼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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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내가 좋아하는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포스터

여배우가 드레스의 끝을 손으로 잡고 서있는 포즈와 트랙에서 넘어진 포즈 두 가지 버전의 포스터가 더 있다.

나는 문 배우가 트로피를 들고 달리는 이 포스터가 가장 문소리답다고 생각한다. 멋지다! 문소리!


그리고 이제야 포스터 왼쪽 상단의 웃픈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트로피는 많고 배역은 없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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