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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h Nov 25. 2018

여자아이들이 충분히 많이 나오나요?

2018년 대한민국 여성 남성의 성비는 1.00입니다.

 예전에 유명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벌칙자를 정하기 위해 이런 게임을 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잡지 한 권을 가지고 출연자들이 돌아가며 아무 페이지나 펼친다. 가장 많은 사람이 등장하는 페이지를 펼친 사람이 승자가 된다. 뜬금없이 왜 이 이야기를 꺼냈느냐면, 동화책을 가지고도 비슷한 게임을 해볼 있기 때문이다.   


 자, 방법은 간단하다.

아이의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한 번 골라보자. 그리고 무작위로 페이지를 펼쳐보는 거다. 떼샷(!)이 나오는 페이지면 더 좋겠다. 그 페이지를 펼쳐둔 채로 아래 질문에 답해보자.


 1 여자(아이)가 있나?

 2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보다 많이 나오나?

 3 여자(아이)가 주인공인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모두 YES!라고 대답해야지만 승자가 결정된다면 게임은 영원히 계속될지도 모른다. 그만큼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만큼 많이 나오며 심지어 주인공이기까지 한 책은 거의 없다. 굳이 이 질문을 던지자고 하는 이유는 그 반대의 경우,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보다 많이 나오고 주인공인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뭐 그깟 동화책 몇 권 가지고 그러냐.’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참 피곤하게도 산다.’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러게. 그깟 동화책으로 이렇게까지 유난을 떨 필요 있을까. 그런데 그렇게 별 것 아니고 중요하지 않은 거라면 더욱 더 궁금해진다. 왜 별 것도 아닌 건데 그 반대의 경우는 이토록 없어서 나로 하여금 이상한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 걸까. 왜 주민번호의 뒷자리는 남자가 1번 여자가 2번인걸까. (*2000년생부터는 남자가 3번, 여자가 4번으로 표기하고 있다.) 왜 거의 모든 문서들의 성별 표기란에는 늘 남성이 여성보다 먼저 오는 걸까. 왜 ‘남선생’, ‘남배우’, ‘남의사’라는 말은 없지만 ‘여선생’, ‘여배우’, ‘여의사’라는 단어는 일상적으로 쓰이는 걸까. 정말 이 모든 것이 그저 ‘우연’이라면 왜 반대의 경우는 발견되지 않는걸까. 어떤 의문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의 책을 고를 때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게 여자아이들이 '충분히' 등장하는지다. ‘충분히’라는 게 얼마만큼이냐면 그러니까 적어도 남자아이들만큼 나오는지 말이다. 하지만 동화책 속 여자아이들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매번 남자 주인공의 여자친구로, 노란색 옷을 입고 분홍색 리본을 단 채로 남자아이들 틈에 구색갖추기 식으로 끼어있는 꼴이다. 그런 인물 구성을 한참 보고 있자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의미있는 수가 확보되어야 그 다음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일단 많은 여자아이들이 나와야 그 아이들의 역할이나 캐릭터적 특성에 뭔가를 기대해볼 수 있을텐데 말이다.

 늘 남자아이들은 네 다섯씩 나오는데 여자아이들은 한 두명 뿐이고 그 캐릭터에 사회에서 주입해온 ‘여성성’을 과하게 투영하는 모양새다. 뽀로로의 ‘루피’와 로보카 폴리의 ‘앰버’를 떠올려보자. 루피는 분홍색으로 쫙 빼입고 늘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얘기한다. 온갖 사고를 치며 ‘노는 게 제일 좋아!’를 외치는 친구들에게 정성껏 요리를 해주는 것도 루피의 몫이다. 앰버 역시 다른 캐릭터들과 마찬가지로 변신 가능한 로봇임에도 (유아용 콘텐츠에서 흔히 쓰이는 여자아이의 상징인) 리본을 하고 있다.

 동화책에서도 늘 같은 일이 반복된다. 그런데 여자아이들이 몇 명씩이라도 더 나온다면, 캐릭터끼리의 차별화를 위해서라도 그 중에 파란색을 입고 공놀이를 좋아하는 여자아이도 생길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래서 아이들에게 더 많은 여성서사를 위한 첫 질문은 “여자들이 충분히 많이 등장하느냐”다. 그래야 주인공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는를 따져보는 다음 단계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수지 작가의 그림을 정말 좋아한다. 정말로. 아마 아이보다도 내가 훨씬 더 좋아할 것이다. <파도야 놀자>는 여전히 아이의 책장이 아닌 내 책장에 꽂혀있고 딸 아이를 낳은 친구들에게는 늘 <아빠, 나한테 물어봐>를 선물했었다. 동화책은 좀 부드럽고 감성적인 스케치와 채색이 많은 편인데 이수지 작가의 그림은 다르다.

 특히 <이렇게 멋진 날>을 봤을 때 과감하면서도 역동성을 표현해주는 그림체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아이들 특유의 에너지와 생동감이 책에서 말 그대로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었달까. 그런 분위기에서 여자아이들이 충분히 많이 등장하고 또 남자아이들만큼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진다는 게 가장 좋았다. 비오는 날 비를 맞으며 뛰고 달리고 나무에 매달리는 아이들 그림을 보고 있자면 그냥 놀이터에서 저 맘 때 아이들이 어울려 노는 걸 보는 기분이다. 자연스럽고 그래서 반짝반짝 빛난다.

 이수지 작가가 그리고 쓴 다른 책 <선>, <파도야 놀자>, <그림자 놀이>, <검은 색>도 모두 여자 아이가 주인공이다. 게다가 늘 기쁘게 이 책들을 펼칠 수 있는 건 이 아이들에게서 수줍음이나 조심스러움 같은 모습보다 생동감과 밝은 기운을 엿볼 수 있다는 거다.



 <수박 수영장>은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한권이다. 아이 돌 즈음에 친구에게 선물로 받은 책인데 그 후로 안녕달 작가의 팬이 됐고 여기저기에 추천도 많이 했다. 이렇게 동화 특유의 상상력을 보여주는 책들이 정말 좋다. 인과율의 지배를 받지 않는 기묘한 아이들의 생각처럼 말이다. 수박 수영장이라니! 수박을 퍼내고 거기에 발을 담그고 찰박찰박 수영을 하는 책이라니. 처음 이 책을 다 읽고 책을 덮었을 때의 그 여운이랄까, 정말 이상하고도 즐거운 이야기를 읽었다고 생각했던 그 마음이 여전히 기억난다.


 수박 수영장에서 어울려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여러 장에 걸쳐 그려져 있는데 그 그림들 속 아이들의 성비는 또 어찌나 바람직한지. 보통 이런 떼샷에서도 대부분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들보다 꼭 몇 명씩 많던데 <수박 수영장>에서는 늘 사이좋게 셋-셋, 다섯-다섯이다. 작가가 신경 쓰셔서 그린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매번 공평하다.  



 언젠가 얘기했듯이, 나는 동화책이 어떤 엄청난 이야기를 보여주길 기대하지 않는다. SF가 아닌 이상 현실이라도 잘 반영했으면 좋겠다. 2018년 2월 기준, 행정안전부의 인구통계 발표에 따르면 여성은 2592만 4379명, 남성은 2585만 5513명으로 우리나라의 남여비율은 1.0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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