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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h Aug 08. 2019

우리에겐 더 많은, 더 다양한 여자 주인공이 필요해요

공주 말고요!


 얼마 전 작은 언니로부터 책을 선물받았다. <작은 아씨들>, <빨간머리 앤>, <작은 공주 세라>, <하이디> 이렇게 네 권의 책들이 새로 번역되어 'the girl classic collection'이라는 테마로 출간된 것이었다. 앞의 두 권은 나 역시 어린시절 아주 좋아했던 책이라 반가웠고 뒤의 두 권은 새로 보는 책이라 설렜다. 네 권의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듯이(그리고 저자 소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네 권이 한 데 묶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여성 작가들이 쓴 여성의 성장담이기 때문이다.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타인과 새로운 세계와 부딪쳐가며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 특히 종종 '청소년 필독도서'같은 이름으로 권해지는 전형적인 스토리들인 셈이다.


 그러고보니 궁금해졌다. <빨간머리 앤>이나 <작은 아씨들>을 읽은 남자 독자들은 얼마나 될까? <데미안>을 읽은 여자 독자들보다 많을까, 적을까? 10대의 고전으로 불리는 <데미안>이 청소년 필독도서가 되는 동안 이 작품들은 어째서 '소녀문학'에 머무르게 된걸까.



 

여자아이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남자가 주인공인 성장담들을 읽으며 자란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저 인간의 서사로서 말이다. 한 번도 "데미안은 남자니까 나랑은 잘 안맞을거야!"라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고 누구도 그런 이유로 내게 <데미안>은 굳이 읽지는 않아도 되는 책이라고 말한 적도 없다. 하지만 <제인 에어>는?, <산적의 딸 로냐>는? 이상하게 여성이 주인공일 때, 우리는 그건 굳이 모두가 읽어야 할 책은 아닌 것처럼 얘기한다. 여성들의 이야기는 무언가 특별한 것으로, 예외적인 것으로, 보편적이지 않은 것으로, 오로지 여성들만의 것으로 남겨두면서 '여성 서사'는 평가절하되었고 소외되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위한 여성서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축이 바로 다양한 여자 주인공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자연스럽게 다양한 성격과 취미, 다양한 직업과 다양한 꿈을 가진 여자아이들을 보고 듣고 읽는 것. 그것이 여성서사의 첫 걸음이다.

 



<야, 그거 내 공이야!>

 

http://whosgotmytail.com/product/detail.html?product_no=217&cate_no=1&display_group=2축구를 좋아하는 여자아이 앨리스의 이야기다. 언젠가 책방 사춘기에서 이 그림책의 표지를 보자마자 마음이 다 환해지는 것 같았다. 드디어 여자아이가 축구복을 입고 축구화를 신고 신나게 공을 차는 그림이었다. 잃어버린 축구공을 찾아 헤매던 앨리스는 결국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그려봄직한 큰 무대에 나서게 되는데 이 그림마저도 너무나 신선하다. 사실 나는 이 책을 보며 이번 여자축구 월드컵에서 우승을 거머쥔 미국 여자 축구팀이 떠올랐다. 결승전에서 미국 팀의 우승이 확정되었을 때, 관중석에서는 "Equal Pay!(동일 임금)"을 외쳤다. 세계 여성의 날에 미국 여자 축구팀원들이 미국축구협회를 상대로 '남자 축구 대표팀과 동일 임금을 지급하라'며 낸 소송의 뜻을 지지하는 목소리였다. 역시 새로운 그림을 익숙하게 만들어주는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소중하다.


PS 후즈갓마이테일은 좋아하는 출판사다. 평소에 좋아하던 곽명주 일러스트레이터가 쓰고 그린 <안녕 리틀 뮤지션> 덕분에 알게 되었는데 이 두 권의 책 뿐만이 아니라 성역할은 가짜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는 <코숭이 무술>,  2016년 볼로냐 국제 어린이 도서전에서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에 선정된 <500원>도 함께 추천하고 싶다.


<소피가 화나면, 정말 정말 화나면...>


 몰리 뱅이 쓴 소피의 감정 시리즈(<소피가 속상하면, 정말 정말 속상하면...>, <소피는 할 수 있어 진짜진짜 할 수 있어>) 중 한 권이다. 나머지 두 권 역시 소피가 자신의 감정과 마주하고 이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이야기이지만 특별히 '화나면'을 조금 더 좋아하는 건, 아이가 화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이다. 아이들은 성인에 비해 감정에 훨씬 민감하고 또 솔직하다. 아직 감정을 숨기는 데 서투른 아이들은 말 그대로 감정을 폭발시키는 일이 잦다. 당장 우리집의 아이만 봐도 거의 매일을 희노애락이 골고루 풍성하게 보낸다. 하지만 어쩐지 동화책에서마저도 아이들은 화를 내는 법이 잘 없다. '분노'라는 것이 부정적인 감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아이들도 화를 낸다.  소피가 화가 나 불을 뿜고 발을 쿵쿵 구르는 커다란 괴물처럼 그려진 장면들은 정말로 직관적이고 누가봐도 화가 나 있다는 점에서 마음에 든다. 어떤 덧칠도 하지 않은 채 아이의 감정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그림이랄까. 그리고 소피가 그 화를 다루는 자기만의 방법을 알고 있는 아이인 점도 아주 매력적이다. 어른으로서도 배울 게 많은 소피의 이야기.  

 

<발명가 로지의 빛나는 실패작>

 

 이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로지가 실패를 거듭하다 마침내 성공한 아이인 것이 아니라 그저 실패하는 중인 아이라 좋고 그런 아이의 실패를 그 자체로 훌륭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다름아닌 오랫동안 비행기 만드는 일을 해온 로즈 이모할머니인 것도 좋다. 계속되는 실패에 좌절한 로지에게 다시 도전하라며 로즈 이모할머니가 준 수첩에 빼곡히 적혀있는 것은 다름아닌 1906년 비행기를 설계한 최초의 여성 릴리안 토드, 아멜리아 에어하트가 대서양을 횡단할 때 탔던 비행기들, 미국 최초로 파일럿 자격증을 딴 여성 헤리엇 큄비 등의 이야기다. 이 페이지들은 그 자체로 이 그림책의 백미다. '비행기'를 얘기할 때면 고작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이 '라이트 형제'뿐이었던 내게도 이제 아주 많은 이름들이 생긴 것에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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