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복무 중 한 선임이 점심을 먹고 나면 하루가 다 지나간 것과 마찬가지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이등병이었고 그 깊은 의미를 헤아릴 수 있는 짬밥이 아니었다. 속으로 '무슨 x소리야'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선임의 그 한마디 때문인지 나는 시간에 대해 약간의 강박이 있다. 예를 들면 전날 술을 마시거나, 늦게까지 깨어있어 다음 날 정오가 다 되어 일어나는 경우 벌써 하루가 다 갔다는 생각에 후회와 심리적 압박 비슷한 것을 느낀다. 누군가는 점심쯤이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은 거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씻고 밥 먹고 어영부영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금방 저녁이 된다. 그날 저녁은 '양'을 아무리 세어 본들 잠이 오질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더 옥죈다. 시곗바늘은 벌써 자정을 넘어 1시를 가리키고 있다. '오늘도 걸렀구나'
하루키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시간관리'와 삶의 '우선순위'에 대한 좋은 내용이 있어 공유하고자 한다.
그렇게 해서 아침 5기 전에 일어나 밤 10시 전에 잔다고 하는, 간소하면서도 규칙적인 생활이 시작되었다. 하루를 통틀어 가장 활동하기 좋은 시간 대라는 것은,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 경우 그것은 이른 아침의 몇 시간이다. 그 시간에 에너지를 집중해서 중요한 일을 끝내버린다. 그 뒤의 시간은 운동을 하거나 잡무를 처리하거나 그다지 집중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일들을 처리해나간다. 해가 지면 느긋하게 지내며 더 이상 일을 하지 않는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하며 편히 쉬면서 되도록 빨리 잠자리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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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에는, 정말로 젊은 시기를 별도로 치면, 인생에는 아무래도 '우선순위'라는 것이 필요하다.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배분해가야 할 것인가 하는 순번을 매기는 것이다. 어느 나이까지 그와 같은 시스템을 자기 안에 확실하게 확립해놓지 않으면, 인생은 초점을 잃고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주위 사람들과의 친밀한 교류보다는 소설 집필에 전념할 수 있는 안정된 생활의 확립을 앞세우고 싶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는 특정한 누군가와의 사이라기보다는 불특정 다수인 독자와의 사이에 구축되어야 할 것이었다. 내가 생활의 기반을 안정시키고, 집필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조금이라도 질 높은 작품을 완성해가는 것을, 많은 독자들은 환영해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소설가로서의 나의 책무이며 최우선 사항이 아닐까? 그러한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독자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없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관념적인 인간관계다. 그러나 나는 일관되게 그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적인' 관계를, 나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의미 있는 것으로 정해서 인생을 보내왔다.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을 짓게 할 수는 없다', 쉽게 말하면 그런 뜻이 된다.
_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무언가를 내주어야 한다.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는 친구들과의 약속을 줄이고 공부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운동선수들은 기록을 내기 위해 낮밤으로 훈련해야 한다. 우리는 ‘인생은 등가교환’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곤 한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인 '세상에 공짜는 없다'와도 닿아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은 하루 24시간이다. 제한된 시간 안에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면 좋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얻는 만큼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한다. 무엇을 선택할지는 개인의 자유이지만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나머지 잔가지를 쳐내가야 하는 것이다.
하루키는 전날 일찍 잠자리에 들고 이른 아침에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를테면 가장 중요한 일부터 (소설을 쓰는 일) 처리해 나간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좋듯이 중요한 일을 먼저 처리하면 오후에는 여유가 생긴다. 목표한 봐를 아직 달성하지 못한 것에 대해 하루 종일 부채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물론 사람들 마다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제각각이겠지만 직장인의 경우 저녁 약속이나 야근, 예상치 못한 회식이 있다는 점은 감안할 때 하루키처럼 아침을 일찍 시작한다면 온전히 그 시간을 자신에게 선물할 수 있게 된다.
동일 조건 속에서도 누군가는 꽃을 피우고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배가 산에 가닿아 있다는 사실을 아주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된다. 그나저나 나에게 큰 깨달음을 준 그 목포 출신의 선임은 어떻게 지내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