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한 잔'이 '일상'이 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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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색달


언제부터였을까. 그저 퇴근 후 지친 나를 달래는 작은 위로였던 한 잔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루의 마침표가, 그다음 날을 버티게 하는 이유가 되어버린 것은.


동료들과의 유쾌하게 시작한 술자리는 집에 돌아와 혼자 마시는 '나만의 시간'으로 이어졌다. 마치 매일 밤 치러야 하는 의식 같았다.


냉장고 문을 열고 맥주캔을 꺼낼 때, 소주병 뚜껑을 딸깍 소리 내며 따는 순간, 그제야 하루가 끝났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한 잔, 두 잔... 숫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현실의 무게를 잊고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을 수 있다는 착각이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이었다. 회사 가고, 일하고, 사람 만나고. 남들 눈에는 별 다를 바 없는 평범한 30대 남자였다. 하지만 내 안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아침에 눈 뜨면 찾아오는 숙취는 단순한 몸의 고통을 넘어, 밤새 나를 갉아먹은 죄책감과 후회로 이어졌다. '어제 마시지 말았어야 했는데', '오늘은 정말 마시지 말자!' 수없이 다짐했지만, 퇴근길 편의점 앞을 그냥 지나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유혹은 너무 강했고, 내 의지는 너무나 나약했다.


술은 나의 약한 모든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기분 좋은 날은 축배라며 마셨고, 우울한 날은 슬픔을 잊으려 마셨다. 편안하면 편안해서 마셨다. 그렇게 술은 내 감정의 주인이 되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술기운에 용기를 얻어해서는 안 될 말이나 행동을 하기도 했고, 약속을 잊거나 망치기도 했다.


관계는 점점 더 피폐해졌고,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은 바닥을 쳤다. 매일 밤 그림자처럼 찾아오는 외로움과 상실감,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술로 지워보려 발버둥 쳤지만, 술이 깨고 나면 모든 것은 제자리, 아니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있었다. 그 시간의 나는 마치 깊은 우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어린아이 같았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아줄 사람이 없는, 차갑고 어두운 곳에 혼자 남겨진 존재.


다행히, 길고 어두웠던 시간들이 지금은 저 멀리 지나간 과거가 되었다. 술잔 대신 펜을 잡고, 취기 대신 책을 펼치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헤매고 넘어졌던가.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정말 위태로웠다. 또 너무나 외로웠다. 술에 의존하지 않고는 단 하루도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던 나날들. 매일 밤 스스로를 자책하고 후회하면서도 다음 날 저녁이면 어김없이 술을 찾던 나. 그런 나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구석이 아리다.


이제 와서 다 털어냈다고, 괜찮다고 말하지만, 솔직히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술에 기댈 수밖에 없었을까. 얼마나 외로웠으면 차가운 술기운으로라도 온기를 느끼려 했을까. 얼마나 무서웠으면 맨 정신으로는 현실을 마주할 용기조차 내지 못했을까. 겉으로는 센 척,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약하고 상처 입기 쉬운 존재였을 테다. 그 무거운 그림자 속에서 홀로 버텨내느라 얼마나 고단했을까. 그때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너는 약한 게 아니었다고. 그 힘든 시간을, 그 무거운 그림자를 끌어안고도 어떻게든 오늘까지 버텨낸 네가 참 대견하다고. 술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절망 속에서도, 희미하게나마 살아야 한다는 끈을 놓지 않았던 네가 참 기특하다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고, 너 자신조차 너를 다그치기만 했던 그때, 홀로 그 어둠을 견뎌낸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고.


이제 더 이상 그림자 속에 숨지 않기로 했다. 마음속 깊숙이 드리워졌던 그 어둠에 이제는 따뜻한 햇살을 쬐어줄 시간이다. 과거의 상처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겠지만, 새살이 돋도록 보듬어주고 싶다. 그 시간을 버텨냈기에 지금의 내가 있고, 포기하지 않았기에 글을 쓰고 책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하려는 용기를 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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