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도피처 술 잔속으로

by 회색달

숨 막히는 회사 공기. 하루에도 몇 번씩 널뛰는 감정선. 보고서는 쌓여가고, 팀원들과의 관계는 삐걱거렸다. 분명 노력한다고 했는데 자꾸만 오해가 쌓였고, 내 진심은 늘 왜곡되어 전달되는 것 같았다. 속에서 천불이 났다. 이걸 어디다 풀어야 하나. 퇴근 후, 자연스레 발걸음이 향한 곳은 편의점이었다. 차가운 캔맥주 하나. '괜찮겠지, 오늘 하루 힘들었으니까. 딱 한 캔만.'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이 '딱 한 캔'이 내 삶을 송두리째 집어삼킬 괴물의 첫 발톱이었다는 것을. 매일같이 이어지는 과도한 업무와 그 속에서 오는 인간관계의 스트레스는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였다. 감정은 롤러코스터를 탔고, 조절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기분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도피처를 찾았다. 가장 쉽고, 가장 빠르게 나를 현실에서 분리시켜주는 것. 바로 술이었다.


한 잔, 두 잔. 처음에는 그저 잠시 숨통을 트여주는 고마운 존재 같았다. 욱하는 감정을 가라앉혀주고, 쌓인 분노를 희석시켜주는 마법의 약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술잔의 개수는 서서히 늘어갔다. 한 캔이 두 캔이 되고, 맥주에서 소주로, 집에서 술집으로. 혼자 마시는 시간이 늘어났고, 술 없이는 잠들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나는 내가 여전히 치열하게 사는 줄 알았다.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다음 날 더 나은 모습으로 버티기 위한 나름의 재충전이라고 합리화했다. 하지만 돌아보니, 그건 재충전이 아니라 방전이었다. 내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 독이었다. 그 시간들은 땀방울 대신 악취만 가득한 썩은 시간들이었다. 노력하고 애쓴 결과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사실 전부 술에 절어 비틀거린 흔적일 뿐이었다. 내 삶은 발전이 아닌 퇴보를 거듭하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들.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 길바닥에 쓰러졌던 날. 중요한 회의에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갔던 창피함. 가족들에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돌아서서 또 술을 찾았던 비참함. 친구들과의 약속을 술 때문에 깬 무책임함. 그 모든 순간들이 악취처럼 훅 끼쳐왔다. 나는 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습관처럼 마시던 술잔에 나를 빠뜨리고 있었던 거다.


그때 깨달았다. 힘들다는 핑계로 술잔을 채우는 행위는 나를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을 뿐이라는 것을. 순간의 편안함 뒤에는 더 큰 고통과 후회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진짜 나를 위한 길은 도피가 아니라 직면이었다. 아프고 힘들더라도 도망치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는 것. 그리고 그 노력의 시간들을 나를 성장시키는 다른 무언가로 채워나가는 것.


어쩌면 중독은 그렇게 시작되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가장 약해진 순간, 가장 쉽고 달콤해 보이는 유혹의 손짓에 무방비로 노출될 때. 그리고 그걸 습관처럼 반복하며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과정. 하지만 거기서 멈추고, 다시 일어설 힘을 찾는다면... 그 악취 가득했던 시간들도 헛되지 않게 만들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힘들수록 술이 아닌 다른 노력, 다른 열정, 다른 성장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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