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관계들: 가족, 친구, 그리고 나

인정욕구로부터 벗어나다.

by 회색달


알코올은 서서히, 아주 집요하게 내 삶을 파고들어왔다. 처음에는 힘든 하루를 끝내는 달콤한 위안이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나의 전부가 되어 있었다. 술에 잠식될수록 먼저 부서져 나간 것은 사람들이었다. 나를 둘러싼 관계들.


가족들은 지쳐갔다. 걱정으로 시작된 잔소리는 나중에는 절망 섞인 한숨이 되었고, 끝내는 무서운 침묵으로 변했다.

어머니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돌아설 때, 나는 알량한 자존심과 술기운에 취해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괜찮다고, 문제없다고, 나만 믿으라고 큰소리쳤지만, 정작 믿을 수 없는 사람은 나 자신이었다. 점점 가족들과의 대화는 줄어들었고, 집은 편안한 안식처가 아닌 들키지 않으려는 긴장감으로 가득한 공간이 되었다.

술 냄새를 감추려 향수를 뿌리고,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를 숨기려 애썼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빛은 속일 수 없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은 이미 괴물이었다.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는 더 빠르게 무너졌다. 잦은 지각, 엉망진창인 업무 처리, 술 냄새 풍기는 모습. 처음에는 걱정해주던 사람들도 하나둘 등을 돌렸다. 회식 자리에서 벌인 추태는 두고두고 내 발목을 잡았고,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제외되는 건 일상이었다.


신뢰는 깨졌고, 나를 믿고 일을 맡기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나중에는 아예 대놓고 무시당하기도 했다. 예전에는 인정받는 동료였는데, 이제는 기피 대상 1호가 되어 있었다. 무시와 시선 속에서 나는 점점 더 움츠러들었다. 그럴수록 술에 위로를 받고 싶었다. 현실에서 도망치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믿었다.


가족, 동료 까지 모두 나에게서 멀어졌다. 나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진짜 고통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모두가 떠나고, 결국 혼자 남겨졌을 때 마주해야 했던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매일 아침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볼 때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충혈된 눈, 푸석푸석한 얼굴,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 어제의 술 냄새가 역하게 올라왔고, 후회와 자책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내가 이렇게까지 망가졌구나.'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 거울 속 나를 통해 생생하게 다가왔다.


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심지어 잠들기 전에도 거울 속 나를 마주하는 순간마다 숨이 막혔다. 그 모습이 너무 싫었다. 역겹고, 한심하고, 구제불능 같았다.


나 자신과의 관계가 완전히 파탄 났다. 거울 속 그 남자와 나는 적이었다. 아니, 차라리 남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를 증오했다. 왜 이렇게밖에 살지 못하는 건지, 왜 이렇게 나약한 건지, 왜 모든 걸 망쳐버린 건지. 끝없이 나를 탓하고 비난했다.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이렇게 비참하게 사느니 차라리 끝내는 게 낫다고. 매일 밤 잠들기 전, 다시는 눈 뜨고 싶지 않다고 빌었다.


그 극한의 절망 속에서 아주 작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거울 속 나를 그토록 증오했던 이유가 뭘까? 왜 나는 나 자신을 인정할 수 없었던 걸까? 나는 늘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다. 잘한다고 칭찬받고 싶었고, 능력 있다고 평가받고 싶었다. 실패를 두려워했고, 실수하는 나를 용납하지 못했다. 완벽하지 않은 나를, 실패를 반복하는 나를, 남들이 외면하듯 나 스스로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이게 문제였구나.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내가 나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행했던 거구나. 술로 도피했던 것도 결국은 실패한 나, 약한 나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성공'을 손에 쥐지 못했기에, 나 스스로를 실패자로 낙인찍고 괴롭혔던 것이다.


그 깨달음은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래, 인정하자. 나는 실패했다. 나는 술에 중독되었고, 소중한 관계들을 망가뜨렸고, 내 몸과 마음을 병들게 했다.


나는 완벽하지 않고, 약점투성이며, 때로는 비겁하기까지 하다.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애써 포장하거나 숨기려 하지 않고, 그냥 '이게 나'라고 인정하는 순간,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를 향한 날카로운 비난의 칼날이 무뎌지는 기분이었다.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욕심, 실패를 숨기려는 강박을 내려놓으니, 비로소 나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남들의 박수나 일시적인 승리가 아니었다. 진짜 만족감은 내 안에서 찾아야 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어제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나아지려고 애쓰는 나 자신. 그 과정 자체가 주는 뿌듯함, 바로 '성장'이었다.


삶은 결핍을 채우거나, 남들에게 인정받고 승리해서 얻는 만족감에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것들은 외부 환경에 따라 쉽게 흔들리고 사라진다. 진짜 행복은 나 자신의 성장에 있었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단단해지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깨달음을 얻고 나니, 거울 속 내가 더 이상 밉지 않았다. 여전히 상처투성이이고 부족하지만, 그래도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를 가진 나 자신이 조금은 대견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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