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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부서에서 햇수로 20년을 일했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수많은 서류와 사람들을 마주했다. 익숙함은 능력으로 포장되기도 하지만, 종종 위험한 함정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이번에 절실히 깨달았다.
엊그제 월간 주요 행사 계획 식순 문서를 결재받으러 온 담당자의 얼굴에선 긴장과 기대가 엿보였다. 베테랑 상사 앞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겠지. 문서를 훑는데 오탈자 몇 개가 눈에 띄었다. 딱딱하게 지적하기보다 웃으며 부드럽게 짚어주었다. 담당자는 곧바로 수정했고, 나는 결재 도장을 찍어주었다. 모든 것이 매끄럽게 진행된 듯 보였다.
하지만 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너무나 당연해서 잊고 있던 진리를 다시 한번 마주했다. 결재까지 완료된 문서, 그것도 몇 번이고 검토를 마쳤다는 그 내용에 치명적인 누락이 있었다. 행사 참석자 명단에 몇 사람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행사가 임박해서야 다른 직원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미 수정할 시간은 없었다. 아찔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문서함을 뒤집어엎고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다행히 우왕좌왕 속에서도 행사는 큰 사고 없이 마무리되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이번 일은 내게 깊은 잔상을 남겼다.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머릿속이 복잡했다. 20년 경력의 베테랑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혹시 모를 '건성건성'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스치듯 본 글이 떠올랐다. 실수를 저지르는 원인이 크게 두 가지라고 했다. 하나는 애초에 건성건성, 대충대충 일하는 태도. 다른 하나는 적당한 속도와 열정을 가지고 있음에도 환경이나 예측 못한 변수로 발생하는 사고. 나는 어디에 해당될까. 오탈자는 잡았지만, 더 중요한 명단 누락은 놓쳤다. 몇 번이고 검토했다는 담당자의 말만 믿고 나 역시 '익숙하니까', '이 정도쯤이야' 하며 건성건성 문서를 대했던 것은 아닐까.
작은 업무 실수였지만, 그 파장은 내 안에서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나는 행사뿐만 아니라 내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이렇게 건성건성 살아온 것은 아닐까?' 과거의 나는 후회를 밥 먹듯 하는 사람이었다. 지나간 일을 곱씹으며 자책하고,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끝없이 가정을 세웠다. 그 후회들이 나를 짓눌렀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았다. 이번 일을 통해 다시 그 후회의 늪에 빠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작은 실수가 과거의 상처를 건드린 셈이었다.
하지만 그때, 내 머릿속에 맴돌던 문장 하나가 빛처럼 떠올랐다.
"삶에게 있어 후회란 내가 할 수 없는 일에 반응인 것이고 다짐은 앞으로 일어질 상황에 대비한 대응이다."
그래, 맞다. 이미 벌어진 일,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대해 아무리 아쉬워하고 자책해 봐야 소용없다.
후회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무기력한 반응일 뿐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 경험을 통해 무엇을 배우고,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 '다짐'하는 일이다. 다짐이야말로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한 가장 강력한 대응이자 준비인 것이다.
이번 행사의 아찔했던 경험과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통해 나는 새로운 다짐을 하고자 한다. 바로 '정성'을 다하는 삶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성'은 단순히 꼼꼼함을 넘어선다. 그것은 어떤 일을 대하든,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고 익숙한 일일지라도, 마음을 다하고 진심을 기울이는 태도다. 서류의 작은 오탈자 하나를 넘어, 그 문서가 담고 있는 내용의 무게와 파급력을 침착하게 헤아리는 마음. 사람들의 이름을 단순히 글자로 보지 않고, 그 이름 하나하나가 가진 의미와 소중함을 되새기는 마음. 그것이 바로 '작은 일 하나에도 건성 하지 않고 침착하게 둘러보는 정성'일 것이다.
이 '정성'은 비단 업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마시는 한 잔의 물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담고, 소중한 사람과 대화할 때 그의 눈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귀 기울이는 것. 매일 쓰는 글 한 줄에도 영혼을 담아 다듬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작은 걸음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삶을 대하는 '정성'의 태도일 것이다. 건성건성 흘려보내는 시간 속에서는 실수도, 후회도 쉽게 찾아온다. 하지만 매 순간에 '정성'을 기울일 때, 우리는 예상치 못한 오류를 줄일 수 있고, 혹여 실수가 발생하더라도 그것이 단순한 부주의의 결과가 아니라 최선 속에서 발생한 배움의 기회임을 깨닫게 된다.
과거의 후회는 이미 닫힌 문이다. 하지만 '정성'이라는 열쇠로 우리는 미래의 문을 열 수 있다. 익숙함이라는 함정에 빠져 '건성건성'하는 대신, 매사에 '침착하게 둘러보는 정성'을 기울이는 것. 이것이야말로 후회에 발목 잡히지 않고, 오지 않은 상황에 단단히 대비하는 '다짐'을 현실로 만드는 방법일 것이다. 이번 행사는 내게 잊고 있던 '정성'의 가치를 다시 한번 일깨워준 귀한 경험이었다. 앞으로 나는 이 '정성'이라는 나침반을 따라, 후회보다 다짐이 가득한 삶을 채워나가려 한다. 작은 일에도 마음을 다하는 그 정성스러운 태도가, 결국 내 삶을 더욱 단단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줄 것이라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