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의 창 밖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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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색달

내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온통 하얀색이었다. 병실 천장. 그 흰색은 일주일이 넘도록 내가 본 세상의 거의 전부였다. 며칠 전만 해도 백 킬로 그람이 넘는 쇳덩이를 어깨에 짊어지고 앉았다가 일어날 수 있던 내가, 이제는 화장실 가는 길 몇 걸음조차 벽을 짚고 가야 하는 느림보 신세가 되었다.

헬스장에서 능력을 과신한 채 무거운 무게에 허리를 맡긴 결과였다.


다음 날 찾아온 극심한 통증에 병원을 찾았다. 정밀 검사 후 '디스크 파열'이라는 충격적인 진단과 함께 시술대에 올랐다. 그리고 이곳, 하얀 천장 아래에서의 강제 휴식이 시작되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창밖을 보는 것이었다. 병실이 꽤 높은 층이라 바깥 풍경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였다. 특히 창문 바로 아래 횡단보도는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었다. 빨간불이 켜지면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젊은이들은 이어폰을 꽂거나 스마트폰을 보며 서성였고, 직장인은 시계를 힐끔거리며 초조해하는 기색이었다. 녹색불로 바뀌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다들 쏜살같이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마치 누가 더 빠른지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어린아이들은 엄마 손을 뿌리치고 신나게 뛰어갔고, 젊은 남녀들은 빠른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가로질렀다.


'빨리빨리', 그동안 내가 살아온 세상의 구호가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빠른 사람들 틈에서 유독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다.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 한 분이셨는데,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느린 걸음으로 횡단보도에 첫 발을 내디디셨다.

성미 급한 운전자들은 경적을 울릴까 말까 망설이는 것 같았고, 뒤따르던 몇몇 사람들은 멈칫하며 할머니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전혀 서두르는 기색 없이 그저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옮기실 뿐이었다. 그 모습에 묘한 동지애가 느껴졌다. 지금 나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한 발자국 뗄 때마다 허리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올라와 나 역시 병실 복도를 느릿느릿 걸어야 했다. 불과 몇 초면 갈 거리를 몇 분에 걸쳐 이동하는 신세라니.


그 할머니는 느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꾸준하게 발을 내디디셨고, 결국 신호가 바뀌기 전에 안전하게 반대편 인도로 올라서셨다. 그 모습을 보는데 갑자기 머리가 띵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속도는 상관없구나. 중요한 건 멈추지 않고 꾸준히 가는 거였어.'


병실 침대에서 벗어나 처음 두 발로 땅을 딛었을 때, 세상은 여전히 하얗게 보였다. 물론 천장이 아니라, 아직은 낯선 회복의 길이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허리에서 올라오는 통증은 내가 '정상'이 아님을, 아직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음을 끊임없이 일깨워주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더딘 속도와 불편함에 짜증부터 냈을 것이다. 답답하고, 뒤처지는 것 같고, 세상의 속도에 발맞추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화가 났을 거다.


하지만 창밖 할머니의 느릿하지만 꾸준한 걸음을 보며 깨달았던 것처럼, 이제는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이 느려짐이 나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헬스장에서 무거운 무게를 번쩍 들고, 일상에서도 늘 '빨리빨리'를 외치며 앞만 보고 달려왔던 나.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내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일 줄 몰랐던 나에게 허리가 보낸 강력한 경고였을지 모른다.


나는 이제 '느림보'로 다시 시작하려 한다. 완전히 건강해지지 않았더라도 괜찮다. 넘어져서 무릎이 까졌다면, 딱지가 앉고 새살이 돋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처럼, 내 허리도, 내 삶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남들보다 조금 더디더라도, 꾸준히 나아가면 된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고, 멈추지 않고 한 걸음씩 내딛는 '지속가능한 움직임'이라는 것을.


앞으로의 삶에서도 이 '느릿하지만 꾸준함'을 마음에 새기려 한다. 글쓰기라는 목표도 마찬가지다.


한 번에 엄청난 분량을 써내려 가거나 단숨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려는 조급함 대신, 매일 정해진 시간 동안 꾸준히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쓴다면 언젠가는 나만의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에 두 시간, 비록 느린 속도일지라도 그 꾸준함이 쌓이면 단단한 성이 될 거라 믿는다.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토리텔링 전략도, 흥미로운 글감 발굴도, 결국은 꾸준한 연습과 성찰 속에서 나올 테니까.


허리 통증은 분명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지만, 역설적으로 나에게 귀한 선물을 안겨주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애써 외면했던 '느림의 미학'을 알게 해 주었고, 화려하진 않지만 끈기 있게 지속하는 '꾸준함의 힘'을 깨닫게 해 주었다. 세상은 여전히 빠르고, 경쟁적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나만의 속도로 걸어갈 것이다. 느려도 괜찮다. 멈추지만 않는다면.


나처럼 '빨리빨리'에 지쳐 있거나, 잠시 넘어졌다고 좌절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그리고 속도보다 꾸준함이 훨씬 강하다는 것을. 서두르지 않고, 지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부터, '느림보'로서의 새로운 삶을 꾸준히 걸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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