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쓰면, 시가 된다.

오래도록 남겨놓고 싶은 평범한 순간들

by 회색달
안부
백현기

날이 잔뜩 흐리다.

무거운 어깨 위로 나뭇잎 한 장 다가와
아무 말 없이 앉았다.

됐다.
충분하다.
감사하다.

네 덕분이다.

가을 저녁, 퇴근 후 아파트 앞 벤치에 잠시 앉아 있는데 나뭇잎 몇 장이 바람에 어깨 위로 떨어졌다.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장면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기록이 시(詩)가 될 수 있을까?


지금 쓰면 시가 된다.


시를 쓰는 사람은 머리가 길고 나이가 지긋한 모습일 거라 상상했다면, 꼭 그런 경우만 있는 건 아니다. 지금 눈앞의 한 장면을 나중에 쓰면 일기지만, '지금' 쓰면 시가 된다. 쓰는 순간 우리 모두는 시인이 될 수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시에 빠져 살았다. 저녁노을이나 유명 여행지의 근사한 풍경들. 사진으로 찍어 남겨 둘 수도 있었지만, 렌즈는 그 순간의 세밀한 감정까지 담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장면에 짧은 몇 줄의 습작을 남겨두었다.


삶이라는 정상을 오르다 만나는 쉼터


산 정상에 오르다 만난 쉼터에서 잠시 숨 고르는 시간이 수필이라면, 시 쓰기는 굳이 어딘가로 여행하지 않아도 오늘을 특별하게 만들 수 있는 시간이 된다. 무심코 밟고 지나쳤던 낙엽, 늘 함께하느라 잊고 있었던 가족에 대한 감사함, 소박한 나의 일상까지 이러한 순간들이 모여 삶의 켜가 쌓일수록, 우리의 매일은 특별함으로 빛날 수 있다.


퇴행 없는 삶을 위하여


내 삶은 늘 부족하지만, 결코 퇴행은 없다. 쓰고 감상하며 배운 결과다. 앞으로도 시 한 편으로 내 하루를 조용히 만지작거렸으면 좋겠다. 내일을 더듬거리며 나아가는 데 작은 지팡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나도 쓸 수 있겠다"라는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다.


화려하지 않아도 좋다. 담배 한 모금에 내뱉는 회색 연기라도 괜찮다. 시를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우리는 매 순간 나아가고 있으며,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 순간이 앞으로도 수없이 반복될 소중한 찰나라는 것을.


'오늘 당신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나뭇잎은 어떤 모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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