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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현기 Apr 10. 2024

오지랖과 용기

여름날의 기억 

20년도의 여름이었다. 그동안 마음속으로 벼르고 있던 일을 저질렀다. 다름 아닌 최신형 자동차를 구매한 것.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만 이 소식을 슬쩍 흘렸다.

"있잖아, 나도 다음 주에 새 차 나온다~!"

"오. 정말? 이제는 똥차를 안 끌고 다녀서 좋겠네! 축하해."

10년째 몰고 다니던 경차를 정리하고 그 자리에서 새 차를 인수받았다. 곳곳에서 풍기는 가죽 냄새. '그치, 이 맛에 돈 벌지.'


그렇게 코 노래를 부르며 운전대를 잡았다. 한참 동안 달려 사무실로 향하는 길. 교차로에 진입한 지가 한창인데, 밀려 있는 차들은 움직일 생각이 없다. 멀리 보이는 신호는 이미 녹색으로 바뀌었는데도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경적만 울려댈 뿐 앞으로 나아갈 기미가 없어 보였다. '이상하다?. 여기가 이렇게까지 밀릴 일이 없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나는 곧바로 비상등을 켜고 사이드를 채웠다. 문을 열고 차 밖으로 나오는 그때, 멀리 차선 한가운데에 노인 한 분이 보였다. 백발에 허리 굽은 할머니였다.' 왕복 6차선 도로에 서 있는 상황이라니.... 상황을 바로 이해했다. '무언가 문제가 있음을!'


곧바로 뛰쳐나가 할머니께 달려갔다. 그제야 보이는 명찰. '저는 알츠하이머 (치매) 환자입니다. 혹시라도 제가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면 도와주세요. 아래 연락처가 있습니다. 010-0000-0000'

"아빠를 찾아주세요. 길을 잃었어요"

"아..;"


과거 노인복지센터에서 봉사활동했었던 경험이 기억났다. 동시에 십여 년 전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신 친척 한 분이 생각났다. 이럴 때 방법은 하나다. 빠르게 안정시키고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절대 목소리를 크게 내거나 큰 동작을 하면 안 된다. 상대방이 겁을 먹어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직 나와 할머니를 사이에 두고 차량은 하나 둘 비켜가고 있었으니 상황은 더 위험할 수밖에. 바로 한 쪽 무릎을 꿇고 할머니의 양손을 잡으며 초점 잃은 할머니의 눈을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제가 아빠 찾아드릴게요.! 저랑 찾으러 가요!"

말은 그렇게 했다지만 상황이 좋지는 않아 보였다. 양옆으로 차들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고 우리 바로 앞에 있는 운전자 역시 빨리 비켜달라는 손 짓을 하고 있었으니까.


순간 '내가 왜 나섰을까...;라는 짧은 후회와 손 놓고 바라만 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다. 이미 내가 나선 일이다. 누구는 오지랖이라고 할지 몰라도 끝까지 해결해야만 한다. 마음속 원망과 두려움이 한데 뒤섞여 올라왔지만 끝까지 가까운 인도로 할머니를 이끌었다. 불과 몇 미터인데도 걸음이 더딘 까닭에 한참이 걸렸다.


 그런 와중에도 차들은 하나, 둘 나를 스쳐 지나갔다. 마침 파출소에 근무하는 분들께서 이 광경을 보셨는지 문을 열어 뛰어나왔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중에 멀리서 할아버지 한 분이 뛰어오는 게 보였다.

"나이 먹고 서로 의지하느라 힘들었는데, 고마워요. 잠깐 한 눈 파는 사이에 집을 나갔지 뭐야. 현관문이 열린 걸 보자마자 뛰쳐나왔네. 고마워요."

연신 '고맙다'라는 말에 괜히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별것 아닌 내 행동이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께는 꼭 필요한 용기였던 것이다.


처음엔 나도 뒤에서 별 신경 안 쓰고 있다가, 남들은 못 본척하고 다 지나치는 일을 혼자 오지랖 부리는 건 이

닌지, 그렇게 다른 사람들 원망하면서 여기까지 걸어왔던 마음이 들킬까 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조심히 들어가세요'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뒤돌아 차를 향해 달렸다. 근처에서 광경을 지켜보고 계시던 아주머니 몇 분께서 박수 치는 소리가 들렸다. 운전대를 다시 잡았는데 두 손이 덜덜 떨렸다. 보통 때 같으면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무서워해 발표조차 하지 않는 나인데, 방금까지의 행동은 내가 아닌 것 같았다. 


한 편으로는 차라리 내가 나설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평범한 내가 누군가를 위해 도움을 내밀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혹시라도 다음에 다른 곳에서 이와 같은 상황이 생긴다면 그때는 아까보다 더 빨리 뛰어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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