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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현기 Apr 14. 2024

얼음 썰매

어제의 눈물이 오늘의 환희로

일곱 살 때까지 시골에서 자랐다. 현대식 아파트나 화려한 상가 대신 단층 짜리 한옥 몇 채와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있었던  하나뿐인 구멍가게가 전부인 곳. 이곳의 이름을  마을 '리'자를 써서 '도두리'라고 불렸다.

 마을과 세상을 연결해 주는 버스는 하루 네 번 밖에 없었다. 그나마 도로라도 포장되어 있어 다행이었다. 건너 마을엔 이 조차도 호사였다. 종종 버스를 타기 위해 나이 많으신 분들도 할아버지 할머니 께서도 논 사이를 걸어와야 했으니까.


마을에서는 매 년 겨울이 되면 정리를 마친 논에 물을 어다가 겨울바람에 얼렸다. 이곳에서 동네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다 같이 어울렸다. 기억해 보자면, 50 채도 안 되는 곳이어서 한 사람 알면 다 아는 얼굴이었고 그만큼 친구 사귀기도 쉬웠다.


열 살  되기 전 즈음 이사를 했는데, 이삿짐 트럭 창문에 매달려 한 참을 봤다. 손에 나무 막대를 잡고서는 얼음 썰매를 밀고 나가는 사람, 앞에서 줄을 잡고 끌어주는 사람 등 등. 오늘이 지나고 나면, 기억으로 남을 거라는 생각에 친하게 지냈던 친구에게도 ' 이사 간다는 말'를 제대로 못한 게 생각났다.



도두리에 살면서 아버지께서는 공사장에서 목공일을 하셨다. 매일 해가 뜨기 전에 집을 나섰다가 해가 지고 나서야 오셨다. 가끔 한 손에 봉투를 들고 오셨는데 그 안에는 주로 치킨이 있었고 겨울엔 붕어빵, 여름엔 아이스크림이 담겨있었다. 그땐 아버지 보단 봉투에 담겨있을 달콤함이 더 기다려졌다.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여보세요~!"

"응. 아들, 아빠다. 오늘 아빠가 선물 하나 들고 갈게. 기다리고 있어!"


오후 다섯 시를 조금 넘은 시간, 아버지께서 퇴근 도 전에 집으로 전화를 거셨다. 보통 밤늦은 시간이라 잠에서 깨어 내복바람으로 인사했었는데, 오늘만큼은 무슨 마음이라도 먹으셨는지 '꼭'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방바닥에 엎드려 숙제를 하고 있는데 대문 밖 익숙한 차 소리가 들렸다. '아빠다!'. 서둘러 신발을 신고 마당으로 나가는데 아니나 다를까, 반 쯤열린 대문으로 아버지가 보였다. 낡은 트럭에서 무언가를 내리고 계셨다.


'얼음 썰매'였다. 각개목 두 개에 대패 질 을 해서는 그 밑에 못을 박아 넣어 얼음썰매의 막대를 만들었다. 썰매 몸 통은 넓은 나무판자 밑으로 양쪽에 각개목을 대고, 다시 그 바닥에 굵은 철 선을 끼어넣어 만들었다. 이름까지 큼지막하게 쓰여있었다. 며칠 전, 친구들과 노는데 '내 것 만 없다'라고 투덜대던 말을 들으셨나 보다. '아빠가 직접 만들었지'라는 자랑도 덧 붙였다.


"아빠 최고~!"


'당시만 해도 플라스틱으로 만든 썰매가 없었다. 아니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 마을엔 없었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아 썰매를 들고 집 앞 논으로 뛰어갔다. 몇몇 형들이 보였다.


"형! 나도 썰매 있다~!"


얼마나 놀았는지 앞 볼이 얼어 땡땡한 것도 몰랐다. 저녁때가 지나서도 들어오지 않자 참다못한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아들! 밥 먹어!"​


아버지께서는 서른네 살이 되어서야 대문 입구에 고추를 달아 놓았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먼저 형이 있었단다. 그땐 어머니 나이도 있으셔서 인지 뱃속에서 얼굴도 못 보고 이별했다는 말을 들었을 땐 어른이 되어서 형 몫까지 잘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짐이 어른 이 되면서 희미해졌지만.


결혼을 했다가 금방 이혼을 겪었다. 결혼은 준비과정을 차분하게 밟아나간다. 이혼은 하루아침에 끝난다. 그 이후에 찾아오는 통증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괜찮다고 해도 가슴에 바늘 몇 개가 남는다. 누가 어깨라도 툭 치기라도 할 때면 삼켰던 눈물에 뱉지 못한 바늘 몇 개가 일렁여 가슴을 콕 콕 찌른다. 그래서일까, 부모님께 맡겨놓았던 아이가 눈에 아른거린다.


"네가 정한 일이지만, 아이가 무슨 죄가 있겠니. 이것도 부모의 역할이다. 괜찮다. 괜찮아. "


이혼을 겪은 뒤부터 아들만 보면 '괜찮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행여 손주에게 흠이라도 날까, 본인 보다 녀석을 챙겼다. 그 모습을 보면서 '부모님은 위대하다'라는 말이 실감 난다.


월급날이면, 쪼개어 부모님께 일부를 부쳤다. 모아둔 것이 없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늘 고맙다는 말에 매번 가슴이 먹먹한 건 부족한 아들 역할을 아주 충실하게 하고 있기 때문일 거다.


두 달 전쯤이다. 오랜만에 휴가를 맞아 부모님 집을 들렀다. 거실에 앉아한 참을 구직신문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버지께서 목수 일을 다시 하고 싶다고 하셨다. 스마트폰을 꺼내 인터넷창에 '목수'를 검색했다. 젊었을 때야 손쉬운 일일 텐데 '나이 일흔을 넘은 할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일까' 걱정이 앞섰다. 먼지까지 마셔가면서 해야 하는 중 노동인데...' 간신히 가슴속에 숨 죽여 놓은 바늘 몇 개가 살아 움직였다.


"제가 직장을 다른 곳으로 옮길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 수 있는 곳으로 갈 요량이었지만 아버지께선 다시 신문으로 눈을 돌리셨다. 왼 손에는 돋보기를, 오른손에는 스마트폰 인터넷창의 큰 글씨 보기를 열어둔 채.


대꾸 없는 아버지의 등 을 보면서 더 이상 말을 있지 않았다. 워낙 성격이 올곧으신 분이라 본인 생각이면 끝까지 밀고 가셨었으니 이번에도 그럴게 뻔했다. 그날 저녁을 먹고 직장 근처에 자리 잡은 숙소로 돌아왔다.



며칠 후, 문자가 하나 왔다. 요즘 아이들의 세상은 신세계다. '라테'는 논에서 눈썰매 타고 학교에서 내 준 탐구생활을 억지로 채우는 게 다였는데, 스마트폰 하나로 온 세상을 놀러 다닌다. 한 번은 어떻게 찾았는지 아기상어 노래를 따라 미국까지 다녀왔단다. 물론 유튜브의 무한 알고리즘에 빠진 날이었지만. 나는 그것도 놀이라고 혼을 내지는 않았다.


오늘 문자는 좀 특별했다. 얼음썰매를 찍은 사진이다. 얼핏 봐도 누가 손으로 직접 만든 것 같다. 가만 보니 내 기억 속 30년 전의 것과 비슷했다. 넓은 판자 위에 삐뚤삐뚤 유성 매직으로 써진 아들 이름까지 쓰여있었다.


조금 다른 점은 앞에 줄이 하나 달려있었다는 것만 빼면.


두 번째 사진은 더 가관이다. 어디를 다녀왔는지 얼음 썰매를 타고 있는 모습에 앞에서는 할아버지께서 줄을 달아 손주를 끌고 가는데 그 모습을 할머니께서 찍었나 보다. 그걸 손주 번호로 나한테 보낸 거고.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께 '혼자서도 잘할 수 있지? '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목수일을 그만두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협동으로 시작된 국밥 장사 때문에 학교 준비도, 밥 도 거의 혼자 먹어야 했다. 부모님께서 바쁘시니 괜찮다고 했다. 늘 그런 아들이고 싶었고, 그렇게 살고 싶었다.


저녁 즈음 돼서 퇴근하는데 어머니께서 전화를 거셨다. 오늘 도두리에 다녀오셨단다. 손주 랑 노느라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고 자랑하시는 어머니 목소리에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때마침 가슴속에 숨겨놓은 바늘 몇 개가 일렁였다.



*23.01.02에 기록한 기록입니다. 이 글을 시작으로 방언 터지듯 하루에 한 편, 2000자 이상을 빠지지 않고 써왔습니다.  

쓰다가 부끄러워 숨겨둔 글이 더 많았습니다. 누가 알아볼까 창피해 세상으로부터 숨어있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하나씩 꺼내어 보려 합니다.

그 시기, 잘 버텨 내었다고 지금의 내가 응원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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