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됐든 얻으려면 그만한 노력이 필요하다. 글을 쓰려거든 읽기를 게을리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것도 많이, 생각하는 수준 이상으로 읽어야 한다. 그러나 읽기의 의미를 가만히 제자리에 앉아 두꺼운 종이를 넘기는 일에만 한정지어서는 안 된다. 눈으로 읽는다는 건 영화감상이나, 집 근처 공원을 찾아 눈으로 담는 것이나, 귀로 듣는 음악감상까지사람이 가진 기관으로 느낄 수 있는 모든 외부 자극에 대해 또 다른 읽기라고 말하고 싶다.
예를 들어 책 읽는 건 싫어하지만 오디오 북을 즐겨 듣는 사람은 글의 형태만 다를 뿐이지, 귀로 읽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지난 7년여 동안 읽기와 기록을 꾸준히 해왔다. 에세이, 소설, 시집 외에도 자기 계발을 위해 주식이나 금융 관련의 내용도 읽고 나름의 기준을 세워 공부했다. 그렇게 24년 8월 30일까지 읽고 기록으로 남겨둔 책이 482번째다. 연간 약 60권 정도의 책을 읽은셈이다.
사실 독서를 시작하고 일 년째 되는 날의 기록은 100권을 넘었었는데 그땐 무작정 읽기를 반복했다. 눈에 보이는 책이란 책은 다 가져다 읽었다. 종종 신문을 읽다가 관련 내용이 궁금하면 도서관에 가 또 읽었다. 말 그대로 누군가에게는 마치읽기에 미쳐 있는 사람으로 보였을터다.
당시엔 읽기 자체만으로도 마음의 불안을 꺼뜨릴 수 있는 무언가가 생기는 듯했다. 아니, 분명했다. 그러니 나는 읽기를 멈추지 않았을까.
처음 100권이라는 숫자를 넘겼을 땐 마치 책의 저자와 친구라도 된 기분이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하물며 상대는 내가 어디에, 누구인지도 모를 텐데도 말이다. 작가를 지칭하여 감히 친구라는 말을 붙인 이유가 있다. 자신만 알고 있는 인생비법을 책 한 권에 녹여 나에게 알려주고 있으니, 그 사이가 친구가 아니라면 가능하겠냐는 말이다.
200권을 넘기면서부터는 이런 친구를 가려 사귀었다. 내가 선택하고, 읽고, 시간을 들여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이 길이 옳다면, 저 쪽은 어떨까?, 이유는 뭘까? , 작가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 때마다 해답을 찾기 위해 더 많이, 더 자주 읽었다. 다만 이전의 독서에서 무조건 저자의 말을 듣기만 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내가 대화의 주체였고, 내 삶에 필요한 조언을 찾아 당신의 힘을 빌려달라고 요구했다.
300권을 넘자 이젠 내 생각을 말하고 싶었다. 문제가 있었다. 머릿속에, 입 안으로만 맴도는 말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과연 이 문장이 나의 생각을 온전히 담고 있는지 까지도 고민이었다.
남보다 유독 독서를 많이 한 사람은 자신의 글을 쓰고, 나아가 책을 내기도 한다는데 '작가'의 삶이란 이런 모습이었다.
'읽고 쓰고 사유하는 삶을 꾸려가는 사람' <글쓰기는 스타일이다> 책날개의 문장 일부 인용.
읽지 않는 사람이 글을 잘 쓰는 경우는 보질 못했다. 하물며 이제 겨우 독서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내가 머릿속의 생각을 써낸다는 건불가능한 영역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될 수 있었던 건 단 몇 줄이라도 손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입으로 말을 잘 하진 못 하는데 키보드에 손을 올려 모음과 자음, 하나씩 누를 때만큼은 마치 수 십 년을 더 살아온 기분 었다. 그만큼 마음이 가벼웠다. 머리와 가슴속을 꽉 채우고 있던 돌멩이들이 몸 밖으로 우르르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아쉽게도 이런 마법과 같은 효과는 오래도록 지속되지 않았다. 읽기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단 몇 권의 책으로 얻어낸 사유를 몇 줄의 글에 옮긴다는 건 잠깐의 감동으로 얻어낼 수 있을진 몰라도 지속하는 건 불가능했다.
다시 읽는 시간을 더 늘렸다. 속도가 늦을지언정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저자의 말을 듣고 나의 생각을 대답하고 손으로는 그와 나의 대화를 정리했다. 혹시모를, 내일의 나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어서였다.
기억해 보면 성인이 되기 전, 그 이후에도 책을 많이 읽었다. 그걸 어딘가에 흔적을 남겨두지 않았을 뿐 그때의 나 역시 책을 좋아했다. 다만 자기 계발의 목표, 성취, 꿈을 위한 내용의 책을 많이 읽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이라던가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와 같은 오늘보다 더 성장할 수 있는 교훈 가득한 작가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직장 다니면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나보다 잘하는 사람을 쫓아가기 위한 나만의 노력이었다. 2,30대의 나는 무작정 목표를 향해 달렸던 시간이 많았다. 그만큼 자기 계발 서적을 많이 읽었고 그 외의 내용은 등한시했다. 당장의 나에게 책찟질 할 수 있을 만한 교훈이 있어야만 책이라고 생각했다.
400권을 넘기면서부터는 삶이 많이 변했다. 어떤 분야에 뛰어난 사람의 비법서 같은 내용보다는 보통 사람의 이야기가 더 마음이 끌렸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을 관찰하며 글을 쓰는 모습에 수시로 탄식했다. 분명 나와 같은 하늘을 보고 있는 사람일 텐데 더 깊고 울림 있는 하루를 보내는 시간이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덕분일까, 삶의 속도가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무작정 목표를 향해 달리기보다 내 주변의 사람, 사물, 하물며 시인들을 따라 길가의 핀 꽃에도 관심이 생겼다. 그런데도 삶은 단단해졌다. 더 많은 원하던 목표를 이루기 시작했고 만족으로 가득 찬 하루가 늘어났다. '이런 삶이 행복인가?' 싶었다.
글을 쓰려다가도 포기한 날도 많다. 어떤 날은 욕만 한 바가지 해놓고 노트북 전원을 끈 날도 있다. 아마 직장에서 사람들과 마찰이 있었는데 말은 못 하고 집에 와서는 혼자 화풀이를 했었던 날인가 싶었다. 시간이 흘러 이런 글을 읽으며 그때의 나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고생했다'다. 그래도 삐뚤어지지 않고 지금껏 잘 살아와 줘서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재능 자체가 없다고 생각해 글을 쓰지 않은 날엔, '나와 이런 비슷한 경험을 했었던 사람이 있지 않을까?' 생각에 인터넷을 검색해 글쓰기와 재능에 대한 상관관계를, '독서가 글쓰기 자체에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이 들 땐 독서가 삶에 미치는 영향을 찾아봤다.
여전히 나는 뭔가 답답한 마음이 들 땐 책을 편다. 멈출 수 없다. 어떤 뛰어난 능력, 처세술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지금도 더 읽는 것에 매달리고 있다.
나는 평범한 사람에서 독자로, 작가를 꿈꾸는 사람으로, 다시 독자로 삶이 수시로 변하고 있다. 마치 '읽고 쓰기'를 반복하는 사람이 곧 작가라는 말처럼 그런 삶을 동경하기라도 하듯. 읽지 않는 삶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책에 완전히 의지하게 된 것이다.
한 발 나아가 '무엇이든 쓰려거든 무조건 많이 읽어야 한다.'라는 나의 스승님 말씀이 뼛속 깊숙이 박혀 있기 때문에 지독한 독서가 곧 나의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의심치 않는다. 24년 9월의 3일째 되는 날, 7년째 쓰고 있는 노트북 안에는 약 1500편의 글이 모였다. 평균 하루 한 편의 글을 쓴 셈이다. 읽으면 곧바로 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젠 직장 동료와의 대화 중 인상 깊은 순간이 있다면 양해를 구하고 스마트폰을 꺼내어 짧게라도 적어 둔다. 이미 알만한 사람은 내가 뭐 하고 있는 중인지 알기에 기다려 준다. 대문호는 그렇게 읽기를 많이 하고 메모도 많이 한다는데;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작가로 조련되고 있었던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