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황빛 사랑스러운 빛깔이 하늘을 수놓는 계절이 왔다. 여름철 과일도 맛있지만, 이것만큼 달콤하진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에 지퍼를 올릴 때면 생각나는 과일, 그리고 한 사람. 홍시와 첫째 고모.
부모님은 과일 행상을 하고 있어서 초등학교 여름과 겨울 방학 땐 공주 시골에 계시는 고모 댁에 나를 내려주셨다. 아버지와 스무 살 넘는 터울이라 자녀 모두 이미 외지로 나간 까닭에 마치 친할머니처럼 나를 키워주셨다.
여느 시골처럼 쌀은 기본이고 고추, 사과, 등 다양한 농작물을 재배하셨는데 매일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이어졌다. 나도 고모를 따라 일손을 도왔다. 그래서 여름방학이 끝나면 바닷가를 다녀온 적 없던 나였지만 얼굴이 새까맣게 타 선생님께서 ‘제일 재미있게 방학을 보낸 것 같네’라고 하신 기억이 난다.
시골집의 생활이 편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재래식 화장실이 가장 힘들었다. 어떻게든 벌레를 쫓으려 팔을 저어도 금방 돌아와 나를 괴롭혔다.
한번은 익기 시작한 감을 앉은 자리에서 몇 개를 집어 먹었다가 화장실에서 고생한 적 있다. 두 개째에 손을 대었을 때 말리던 고모의 말을 들을 걸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그런데도 나는 감이 좋았다. 가을엔 감을 익힌다며 작은 방에 불을 때고는 커다란 상자에 몇 개씩 담아 그 위에 겨울 이불을 덮어둔 것도 좋았다. 껍질을 벗기고 일정한 한 격으로 꼭지를 실을 묶어 천장에 매단 것도 재미있었다. 며칠만 지나면 달콤한 홍시와 다음엔 곶감을 먹을 수 있었으니까. 신기했다. 이름은 하나였는데 익히는 방법에 따라 이름도, 맛도 달랐다.
마지막으로 고모 댁을 다녀온 건 중학교 입학 전 겨울이었다. 연세가 있으셨던 고모는 어느 날부터 이상하게 변했다. 험한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으셨던 분이 화를 하고, 급기야 사람들에게 욕까지 했다고 들었다. 알츠하이머, 치매였다.
소식을 들은 아버지께서는 그 자리에서 한숨을 푹 쉬고 어머니는 한참을 우셨다. 나는 처음엔 무슨 병인지 몰랐다. 얼마 전까지 만났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작은 방에서 나를 위해 감을 만들어 놨다고, 지난가을에 딴 밤을 마당에서 구워주시기도 했었으니까.
여러 친척 어른이 모여 의논 끝에 고모는 시설로 옮겨 가시기로 했다. 상황을 알고 계셨는지 고모께서도 곧바로 수긍하셨단다. 마지막 날 가까운 친척, 우리 가족, 고모까지 모여 시간을 보냈다. 여느 때처럼 마당엔 장작불이 타는 소리가 들렸고 어른들은 술상에 모여 집이 시끌시끌했다.
늦은 밤 고모께서 마당 앞으로 지나갔다. 나는 무슨 일인가 하고 뒤를 따랐다. 그곳엔 오래된 감나무가 있었다. 주렁주렁 열려있던 감은 없었고 나무 꼭대기에 까치밥이라며 남겨둔 몇 개가 전부였다.
고모는 양파 자루를 엮어 만든 장대를 능숙하게 몇 번 휘두르더니 남아 있는 감을 전부 땄다. 안에는 곧 터질 것 같은 홍시가 있었다. “현기야, 받아라.” 하며 홍시 한 개를 내미셨다. 지난번까지만 하더라도 까치밥이라며 손도 못 대게 하셨는데, 나를 예뻐하신 고모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30년 전 기억이다.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고모는 이듬해 겨울에 영면하셨다. 소식은 늦은 밤 전화로 왔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철렁하셨다고 했다. 죽음을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나는 다음 날 학교에 가야 하니 집에 있으라고 하셨다. 사실 따라나설 용기도 없었다. 두려웠다.
어른이 된 지금, 그때 시골에서만 먹을 수 있었던 나무에서 방금 딴 홍시가 먹고 싶다. 차라리 그날 밤 나도 부모님을 따라나섰다면 그리움이 덜 할 수 있었을까? 이젠 시골 감나무가 아니라 마트에서 홍시를 만난다. 그때 손 내밀어 주시던 홍시 맛이 입안에 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