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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용서해 줄게'를 믿었다.

by 리얼라이어

‘솔직히 말하면 용서해 줄게’ 한 마디에 믿어 버리다니, 나도 참 순진하지.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왜 난 대놓고 갠 떡밥에 홀랑 넘어가 낚시 미늘에 걸린 생선 신세가 되었나 이 말이다. 그럼에도 쏟아지는 의심의 눈초리에 아랑곳하지 못하고 꼴깍대는 침을 만든 혀밑샘, 너 정말 얄밉다. 영혼마저 탈탈 털리고 나서야 알았다. 미끼가 좋으면 믿고 걸러야 한다.


맡길 것인가, 내가 할 것인가는 우리 부부에게 의미 없는 논쟁 거리였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란 것이다. 야무진 데다 계산이 밝은 아내가 가계 사정을 돌보는 것이 이치로 보아 옳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점점 고층으로 도약할 수 있게 정성으로 노력하면 될 일이었다.


오히려 쪼개고 나누는 역할을 맡을까 걱정했는데, 거침없는 아내의 천명에 유리 지갑을 기꺼이 내어 주었다. 사실 그런 일은 영 자신도 없고 신경도 쓰기 싫었다. 다만, 합당한 용돈을 청구할 계획이었다. 이 정도는 당연한 권리다. 합당한 용돈을 받는 것은 성실한 의무를 다한 가장의 행복 추구권이다.


그러나 난 수족관의 관상어였다. 움직임이 훤히 보여 용처에 대해 추궁을 당했다. 내사에 들어갈 것을 대비해 수초에도 숨어 봤지만 허사였다. 그래도 굶기지 않는 수족관 관리자에게 감사해야 했다. 또 때가 되면 환수도 해주고, 여과기도 청소해주고, 수초도 바꿔줬다. 그렇게 길들여졌다. 거스르지 않으니 평안함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것에 익숙해질 때쯤 아내가 모르게 다소 큰 액수의 공돈이 생겼다.


합당한 용돈을 받게 되면 비상금을 만들 계획이었다. 계획을 구상할 때 이미 기간과 금액을 정해 놓았던 터라서 디데이를 표시해둔 스케줄러를 습관처럼 봤었다. 그것으로 친구들에게 제대로 호기를 부릴 셈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요원한 일이 됐다.


하지만 언제 지워버렸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던 디데이를 다시 설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만약 들어온 공돈에 관해 아내에게 고백한다면 적어도 30%의 수수료를 챙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푼도 건져 내지 못할 수도 있다.


결정을 했다, 비밀로! 약간의 두려움과 죄책감도 따랐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탕자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지 않았던가. 아내에게 걸리더라도 회개하고 용서를 빌면 나도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디서 이런 굳은 믿음이 갑작스럽게 생겼는지 모르겠다. 역시 돈 앞에 교활해지고 뻔뻔하게 되는 한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연기를 해야 한다. 완벽한 시나리오로 완전한 연기를.


이래 봬도 난 영화 학도 출신이다. 시나리오도 쓰고, 연출도 하고, 연기도 하고, 제작도 해봤다. 졸업하고 현장 경험도 있는 플레이어 출신이다. 계속 남아있었다면 지금쯤 굵직한 영화제에서 수상의 영광을 누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촬영이 시작됐다. 서사가 매력적이고 캐릭터도 훌륭하다. 캐릭터에 몰입된 매소드 연기에 나도 감탄했다. 그런데… 돌발상황에 부딪쳤다. 영화 제작으로 보면 크랭크업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아내가 날 침대로 밀어 넣었다. 혹시 들킨 것은 아닐까?


자기야!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지?


달콤하고 촉촉한 음성과 매혹적인 자태에 하마터면 고백할 뻔했다.


괜찮아!
솔직히 말하면 용서해 줄게, 응?


어쩌지? 들켰나? 어떻게 안 거지? 기회다! 잡아야 한다! 떠난 버스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난 그 자리서 서슴없이 모든 것을 다 말해버렸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 쪼개 놓은 진짜 비상금은 끝까지 잡아떼려 했지만 탈탈 털리는데 1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날 난 외롭고 쓸쓸한 긴 밤을 보냈다. 먹을 땐 몰랐는데 저녁에 먹다 남긴 고등어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잠이 오지 않았다. 라디오를 켰다. 베르디의 레퀴엠이 스피커를 찢어 놓았다.


운이 따른다면 조만간 아내가 모를 목돈이 생길 것 같다. 정확히 8년 만이다. 지난날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그때 그 순간을 복기해야 한다. 이번엔 ‘용서’라는 미끼를 절대 물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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