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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chaelKay Mar 02. 2019

# 87. 산타 할아버지와 루돌프


제제가 성장함에 따라, 전에는 필수 아이템이었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것들이 많다.  

마치 의도된 소품처럼 제제의 지난 사진 속에 자주 등장하는 녀석들이다. 제제의 손때가 묻은 그것들을 차마 중고로 처분하거나 버릴 수는 없었다. 우리에게 추억을 선물했으니, 누군가에게 전해져 다시 제 몫을 하기를 바랐다.

몇 차례에 걸쳐 아이가 있는 지인들에게 제제가 사용했던 것들을 나누어줬다. 보내는 이와 받는 이의 마음이 한 데 엮여 기분 좋은 순간이 만들어졌다.  
 
중고로 이것저것 판매했다면 꽤 많은 돈을 손에 쥘 수 있었겠지만, 아내와 나는 합리적이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저 제제에겐 필요하지 않은 그 물건들이 새로운 아이와 조우하고 그 가치를 이어간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이번에는 미끄럼틀이다.

늘 그렇듯, 제제의 의사를 타진하는 것으로 '드림'은 시작된다. 부모가 선물했지만 제제의 소유니까 반드시 상황을 설명해주고 의견을 구한다. 미끄럼틀이 필요한 아이가 있다고 운을 띄우며 대화를 시작했다.  

"누구에게 줄 건데?"

"제제는 이제 멋진 오빠가 돼서 놀이터에 있는 길고 높은 미끄럼틀을 탈 수 있지만 그 아이는 아직 연습이 필요한 것 같아."

잠시 생각하던 제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빠의 이야기가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느낀 모양이다. 어떤 생각이라도 다 좋으니 아빠에게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냥 미끄럼틀을 사면 되잖아."

"부모님들이 일 때문에 바쁘시대. 그래서 장난감 마트에 함께 갈 시간이 없나 봐."

원치 않으면 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다. 제제 물건이니까 제제의 뜻대로 하면 될 뿐,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나쁜 것은 아니라고 전하며 어깨를 톡톡 두드려줬다.

"그럼, 나도 같이 가."

제제의 허락이 떨어졌다. 혹여 억지로 결정한 건 아닐까 싶어 재차 확인했지만 제제의 의사는 확고했다. 되려 빙긋 웃으며 어디로 가져다주면 되느냐 묻기까지 한다.

즐거운 마음으로 아파트 커뮤니 게시판 사진과 글을 올렸다. 저렴한 제품이라 민망한 마음도 있었지만 누군가에겐 꼭 필요한 것일 수도 있으니 너무 부끄러워하지는 않기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을 올리고 채 십 분이 지나지 않아 필요한 분의 답글이 달렸다. 문자 메시지로 주소를 받은 후, 미리 준비해 둔 미끄럼틀을 들고 집을 나섰다.

"아빠, 우리가 택배 아저씨로 변신한 거야?"
 
"아니, 아빠는 루돌프고 제제는 산타 할아버지야."
 
하얗게 쌓인 눈도 없고, 짐을 나를 썰매 역시 없었지만 산타할아버지와 루돌프는 무사히 선물을 배달했다. 돌아오는 길, 우리의 얼굴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아파트 커뮤니티 나눔 게시판에 글을 올렸어요. 제제가 사용하지 않는 미끄럼틀을 누군가에게 건네고 싶었습니다.


물론 제제의 허락을 받았죠.
받는 아이가 제제에게 무척 고마워할 거라고 말하자 제제는 즐거워했습니다.
제제와 함께 들고 가서 공동현관 앞에 두고 왔습니다. 제제는 산타 할아버지고 저는 루돌프였어요.
답례는 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군지 얼굴을 알릴 필요도 없죠. 그냥 잘 사용한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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