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말,
산책을 하던 제제가 한숨을 쉬더니 불평을 늘어놓았다. 꽃은 언제 피는 거냐고 묻길래 아직 한참 기다려야 한다고 대답한 직후였다.
"왜 자꾸 기다리기만 해야 해?"
볼멘소리를 하는 제제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무는 여전히 앙상하기만 하고, 누렇게 시든 풀밭에는 움직이는 것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어린아이에게 이런 풍경 속 산책은 시큰둥할 수밖에 없다.
반전이 필요했다.
잠시 궁리한 끝에 날씨정보를 떠올렸다. 제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매일 산책을 하거나 소풍을 다녔다. 그 때문에 습관으로 자리 잡은 것 중에 하나가 일기예보 검색이다. 분명 내일 눈이 내린다는 예보가 있었다.
"아빠가 눈 내리게 해 줄까?"
"진짜? 우리 그럼 눈싸움 하자."
내일 '눈 괴물'을 부를 거라고 말하자 제제는 신이 나서 아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 제제가 좋아하는 눈이 잔뜩 내릴 수 있게, 아빠가 '눈 괴물'에게 명령을 내릴 거라는 대목에서는 존경의 눈빛마저 보였다.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아빠, 코코 자고 나면 눈이 내리는 거지?"
"그러~~~ 엄!"
경남 김해는 좀처럼 눈을 보기 어려운 도시다. 하지만 기왕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탔으니 뛰어내릴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남들에겐 불신의 대상인 기상청이 내게는 하늘과 닿아있는 유일한 동아줄이 됐다. 아빠를 믿는 제제와, 기상청을 믿는 아빠는 각자의 생각 속에서 열심히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
새벽 5시경에 일어나 운동하러 집을 나섰다. 아파트 공동현관 밖으로 흥건하게 고인 빗물이 보였다. 눈이 아니라 비다. 기상청은 역시 썩은 동아줄이었다며 장탄식을 하고는 피트니스센터로 향했다. 그렇게 새벽부터 땅을 적시던 비가 잠시 소강상태를 유지하는가 싶더니, 이게 웬걸, 운동을 마칠 즈음엔 눈으로 탈바꿈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기상청, 널 잊지 않을게.'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앞으로 예보가 열 번 틀릴 때까지는 절대 비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썩은 줄 알았던 동아줄은 알고 보니 황금빛이었다.
그러나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비는 일단 눈으로 바뀌었지만 제제에게 보여줄 때까지는 계속 내려줘야만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흩날리던 눈발이 조금씩 굵어지더니 어느새 함박눈이라고 부를 수준이 됐다. 땅을 하얀색으로 촘촘히 덮어가던 눈은 시간을 두고 조금씩 쌓여갔다. 내리는 눈꽃 사이에서 마냥 기쁜 표정을 지으며 춤이라도 추고 싶은 기분이었다.
"제제, 얼른 나가보자."
기상 후, 먹고 마시기를 마친 제제를 재촉했다. 옷을 서둘러 갈아입히고 가방을 챙겨 들고는 집을 나섰다. 어린이집에 등원하는 길, 제법 하얗게 변한 세상이 제제를 맞이하고 있었다. 지난해 겨울, 이곳으로 이사를 하고 이제 막 일 년이 지났는데 이 정도로 쌓인 눈은 처음이다.
"우와..., "
제제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제 아빠와 산책하고 돌아올 때는 분명 아무것도 없었는데 보이는 모든 것이 신기한 듯 제제는 여기저기 바쁘게 시선을 옮겼다. 그 시선을 하늘로 옮겨 내리는 눈을 한참 지켜보던 제제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아빠, 약속 지켜줘서 고마워."
나란히 서서 눈이 쌓여가는 길을 걸었다. 발걸음마다 뽀드득 소리가 따라붙는다. 발자국을 길게 이어가다가 어린이집에서 하원 하면 눈싸움을 하기로 약속했다.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하는 우리를 '눈 괴물'이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종일 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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