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이 주는 불편함
1편 먼저 읽기 : https://brunch.co.kr/@reali7879/24
브런치에 심리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는데 내가 올린 글 중 가장 반응이 좋았던 글이 아이러니하게도 '심리학 글이 싫은 이유'였다. 심리학자가 쓴 심리학 글이 싫은 글이 인기라니. 요리사가 쓴 요리가 싫은 글도 인기려나.
요즘 유행하는 '까는 재미'에 나도 편승한 것이 아닌가 싶어 조심스럽지만, 사실은 서점의 심리학 책이 왠지 거북스럽고, 또 아쉬웠던 것은 십 년도 넘게 계속 느끼고 있는 일이다. 어쨌거나 심리학 글이 자꾸 뭔가 우리에게 촉구하고, 우리를 가르치려 들고,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면 한 번쯤은 멋진 반기를 들어도 되지 않을까?
발전한 현대 과학이 우리를 진정 더 행복하게 해주었는가 우리는 반문할 때가 많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내면과 작동원리에 대해 더 이해한다는 것이 우리를 진정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행여 인간에 대한 과학적이고 통계적인 지식이 쌓일수록 우리의 일상적인 사건 하나에도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타인의 행동 하나하나에도 과잉해석을 남발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가전제품을 쓰기 위해 전기 이론에 대해 다 알 필요가 없듯이 행복한 삶을 위해 심리 이론을 다 알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심리학적 배경이 없는 일반인들이 다 이해하고 소화하기 힘든 수준의 심리학 이론들까지도 마치 상식으로 알아야 하는 것처럼 쏟아져 나온다. 이걸 모르면 당신은 누군가에게 이용당할 수 있다는 듯이.
아동 상담을 온 부모들이 자녀들은 어떻게 키워야 하냐며 수많은 불안 섞인 질문들을 쏟아낼 때, 나는 의외로 간단한 대답만을 한다. "괜히 육아서 보고 더 초조해지지 마세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그렇겠지 라고 생각하는 그 방식으로 키우면 됩니다" 아이는 부모의 말 한 마디나 지침 하나에 인생이 바뀌지 않는다. 아이를 충분히 사랑하고, 아이에 대해 적절한 정도로 고민하고, 틈틈이 남의 방식도 엿보는 정도면 대부분의 아이는 잘 자란다. 섬세하고 특별한 심리학적 지식이 필요한 아이는 자폐아동처럼 일부에 불과하다.
학교에서 심리학을 배울 때는 예를 들어 '후광효과', ' 플라시보 효과' 등 재미난 심리 이론들을 배우게 되면 자신의 주변 경험과 현상을 모두 이 이론들로 설명하려 드는 선무당 시기가 반드시 온다. 임상심리학을 전공하고 정신과 병원에서 수련을 받을 때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서든) 적절한 진단명을 붙여주는 재미에 빠진 적이 있다. 그만큼 심리학은 어설프게 배워도 그럴듯하게 아는 체 하기 좋은 분야이다. 그래서 그런 글들도 많다.
심리학은 심리학만 배워서는 안된다. 인간, 세상,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함께 되어야 심리학적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다. 그런 배경 없이 구미에 맞는 심리학 개념 몇 가지만 배운다면 그것으로 멀쩡한 사람 잡기도 쉽고, 나와 다른 배경의 사람을 내 틀로 재단하고 비난하려 할 수 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몇 년간의 수련 과정을 거쳐 나름 홀로서기를 한 전문가가 되어서도 나는 부모들이 많은 질문들을 해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애도 안 키워본 상담가가 양육 상담을 해주어야 했다. 부모들은 나를 의지하는 눈빛을 보냈다. 내가 해주는 말은 정식 이론에 근거했으므로 말이야 틀린 말은 없었겠지만, 그것이 어디 내 것이던가? 심리학자들은 그렇게 태생적으로 좀 만 배워도 바로 타인에게 알려주어야 하는 숙명을 타고 난다. (상담이 아닌 연구나 저술활동으로 먹고사는 사회심리학 등 인접 심리학 전공자도 아는 체를 해야 먹고살 수 있는 것은 같은 운명이다)
그래서 심리학의 독자들은 심리학자들이 태생적으로 아는 체의 전문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알기는 알지만 그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할 것도 괜히 만들어내는 것이 심리학자이다.
의사와 영양학자는 백미보다 현미, 통곡물 섭취를 권한다. 씹기에는 불편하고 오래 걸리지만 천천히 소화되기 때문에 혈당 관리에도 좋고, 수많은 영양소가 파괴되지 않은 채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너무 정제되고, 다 정리되어 있으며, 씹어 먹기만 하면 되는 그런 글, 그런 책은 좋아하지 않는다. 현미, 통곡물, 또는 그 보다 더 거친 도정도 되지 않은 천연의 재료가 듬뿍 담겨 있는 글들이 좋다.
우리 인생은 얼마나 많은 현상을 담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곱씹어 볼만한 일들을 담고 있는가. 지나간 하나의 사건을 두고 십 년, 이십 년이 흐르면서 그것을 다시 생각하고, 또 다른 경험에 비추어 다르게 생각해볼 때 우리의 삶 속에서 얼마나 진귀한 영양소가 생겨나는가. 힘들다고만 생각했던 고생하던 시절의 일들이 시간의 힘을 빌어 더 진득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 흡사 김치나 젓갈 같은 발효음식을 보는 듯하다. 모든 양념에 더하여 반드시 세월이라는 것이 더해져야 하고, 그래서 더 깊은 맛을 내는 그것.
때로 심리학 글들은 그런 면에서 공장에서 나온 '정백당'같은 느낌을 받는다. 버릴 것 하나 없이 균질하고 단일한 어떤 것을 주기에 유익하지만, 빨리 받아들이면 될 뿐 오래 곱씹을 만한 것은 없다.
베스트셀러인 '미움받을 용기'같은 책을 보더라도 그 내용은 너무나 좋지만 아들러, 또 그의 제자들이 오랜 경험과 연구 끝에 내놓은 그 귀한 지식을 섭취하는 독자들의 태도는 어떠한가. 통곡물을 천천히 씹어먹는 태도인가, 아니면 달콤하고 유용할만한 표현만 쏙쏙 뽑아먹고 버리는 - 사탕을 먹는듯한 태도인가.
서점의 심리학 책들이 '제목 낚시'로 승부를 보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사실이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제목이 별로면 독자에게 외면받는다. 제목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는 책도 없고, 제목만 봐도 내용이 다 짐작이 된다. 그럼에도 오히려 꽉 차 있는 내용이 없음을 알기에 오히려 부담 없이 집어 드는 것이 심리학 서적이다. 무겁고, 진득한 내용이 많은 - 통곡물 같은 책은 아무도 읽지 않는다. 많은 심리학 서적들이 포장된 캔디처럼 순간의 만족감을 위해 팔린다. 그래서 심리학자가 쓴 심리학 책 보다 종교인, 저술가, 컨설턴트 등이 쓴 심리학 책이 더 잘 팔린다.
1편에 이어 2편까지 심리학 글을 깠다. 큰일 났다.
사람은 남을 비판하기 전에 자신을 더 많이 반성해야 하는 것인데. 그래서 나는 백기를 먼저 든다. 어쩌면 나는 좋은 심리학 글을 쓰는 연습을 하기보다는 '저렇게는 하지 말아야지' 그 생각만 해 왔던 게으름뱅이일 것이다.
좋은 글쓰기가 필요하다. 꼭 심리학뿐만은 아니다. 아는 체로 끝나지 말아야 한다. 지식을 힘으로 삼아 사람을 괴롭히는 글도 안된다. 그럴듯한 포장으로 속이려 해서도 안된다. 쓰는 이와 읽는 이를 생명력 있게 이어주는 글쓰기가 되어야 한다. 같이 대화하는 글쓰기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는 많은 분야의 글작가들이 있지만 세상의 많은 영역을 두루 포용하고, 사람에게 가장 상처 주지 않으며, 그럼에도 와 닿는 글쓰기를 심리학자들이 잘 했으면 좋겠다. 심리학에 대한 내 애정이 컸기에 이런 글도 쓰는 것임을 다시 언급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