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4부<문을 열며> 제28장. 성공 정체성

by 박광석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이자 상담 마지막 날이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하진의 마음은 불협화음을 이루었다.

형은 방에서 나오지 않고, 부모는 이혼 서류와 도장 얘기만 했다.


상담실은 집과 달랐다.

땅 아래의 어둠과 구름 위의 밝음처럼.

유리창을 뚫고 들어온 겨울 햇살이 하진의 어깨 위에 길게 내려앉았다.

천사가 건네는 미소처럼.


하진은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만약 엄마 아빠가 공부를 뜯어말렸다면요? 학교 가지 말라고. 공장에서 돈 벌어오라고. 그랬다면 오히려 제가 더 공부하고 싶었을지도 몰라요.”

영애는 미소 지었다.

“그럴 수도 있지. 비교장소의 저울이 기울어야 행동하려는 충동이 생기니까.”


하진은 얼른 맞장구쳤다.

“맞아요. 부모님은 밥, 잠, 공부까지 다 챙겨줬거든요. 그런데 친구 만나거나 게임 하는 건 막았어요. 공부 저울은 평평하게 해 놓고, 욕심 없다고 혼만 내셨죠.”

영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을 떠먹이면서 우물 파라고 했던 거지. 네가 목이 말랐으면 스스로 팠을 텐데….”


영애가 물었다.

“그 갈등 속에서 넌 어떻게 했어?”

하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학원도 안 가고, 학교도 자주 빠졌어요. 밖에 잘 안 나가니까, 씻는 것도 귀찮고.”

영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해야 할 일을 안 했단 말이지? 포기 행동을 했구나.”

숨을 한번 깊게 쉰 영애는 덧붙였다.

“에너지가 딸렸던 게지. 심리적 욕구 충족이 충분하지 않으니까.”

하진은 뿌옇던 행동들이 또렷하게 보였다.

맞다.

포기였다.

그러자 엄마의 잔소리는 더 심해지고 싸움은 더 잦아졌다.

이걸 악순환이라고 하는 거지.

하진은 영애의 눈을 보며 물었다.

“근데 엄마의 잔소리가 심해질수록, 전 왜 더 게임에 빠졌을까요?”

영애가 조용히 물었다.

“그랬구나. 게임 말고도, 굳이 안 해도 될 행동들을 한 게 있어? 너나 엄마를 힘들게 한.”

하진은 힘들게 고백하듯 말했다.

“전자담배 건으로 경찰서 갔을 때, 대든다고, 갑자기 폭발한다고, 엄마가 못 견뎌 했어요. 저는 장염으로 화장실 들락거리고, 너무 무기력해 꼼짝도 못할 때가 힘들었고요.”

영애는 읊조리듯 말했다.

증상 행동. 증상들을 보였구나. 욕구 충족이 좌절될수록….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몸부림이었던 게지.”

하진은 서운함이 치밀었다.

애쓰는 나에게 부모는 꾸짖기만 했다.

영애는 하진의 표정을 살폈다.

중독으로 안 가서 다행이네. 엄마와 관계가 더 나빠졌다면? 왜곡된 방식에 고착했을 텐데. 주변에 중독되었다 싶은 친구를 본 적 있어?”

“있어요. 밥도 잠도 안 자고 게임만 하던 친구가 있었고… 약물로 어디 간 애도요.”

하진은 잠시 시선을 떨구었다가 들었다.

“전… 다행인 거죠? 상담 안 받았으면 저도 그쪽으로 더 갔을 텐데.”

하진은 지난 세월을 떠올리는 듯 허공을 바라봤다.

“부모님과 싸울수록 전 점점 더 허접해졌던 것 같아요.

영애는 하진의 말을 받았다.

”너에 대해 ‘실패 정체성’을 가졌다는 거구나.“

하진은 그 말을 되뇌었다.

‘실패 정체성….’

말이 멎자, 세상도 함께 숨을 죽였다.

창밖엔 눈송이가 조용히 쌓였다.

켜켜이 쌓인 눈이 세상의 모든 소음을 삼켜버렸다.

하진은 진지하게 말했다.

“예전엔 형처럼 공부 잘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엄마 아빠에게 당당하고 싶었어요.”

그는 수줍게 고개를 저었다.

“근데 지금은 아니에요. 이제 제가 바라는 건, 제 삶의 주인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누군가에게 고마운 사람이 되는 거요.”

하진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제가 ‘고맙다’는 말을 들은 건… 할머니 부탁을 들어드렸을 때예요. 그리고 상담 중에 선생님이 제게 고맙다고 했지요.”

영애가 부드럽게 물었다.

“그러니까, 네 바람이 달라졌다는 거니?”

하진은 자신 있게 말했다.

“네. 그리고 Want만 달라진 건 아니에요.”

“그럼 뭐가 달라졌을까?”

“엄마가 화내도 이제는 제 속을 끓이지 않아요. 오히려 엄마가 안쓰러워요. 친구가 시험 점수 물어볼 때도, 이젠 그 아이를 노려보지 않아요. 그냥 ‘짜식’ 하면서 성적표를 감춰요. 날 친구로 대해줘 고맙기도 하고요.”

영애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오! 멋진데! 같은 자극에 다른 반응이라니. 대처방식이 완전히 달라졌구나.”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엄마의 고함도, 문을 닫는 소리도 예전처럼 심장을 찌르지 않아요. 이젠 그 소리가… 그들의 절규로 들리는걸요.”

영애가 조용히 말했다.

“네가 말한 걸 들어보면, 너 스스로 네 욕구를 충족시키는 힘이 훨씬 많아진 것 같은데. 어때?”

하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미소 지었다.

“그런가 봐요. 적어도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런 인간은 아닌 것 같아서요. 상황은 예전보다 더 나빠졌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 상황에 덜 휘둘리고, 자신감이 더 붙은 걸 보면요.”

영애는 미소 지었다.

“성공 정체성이 생긴 게지.”

성공 정체성이요?

하진은 눈을 반짝였다.

“그래. 너처럼 책임 있게 선택하고,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는 능력. 자신을 다스리는 내적 통제력이 향상되었다는 뜻이지.”

영애는 흘깃 시계를 보더니, 의자에서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하진아, 오늘로 상담을 마친다니 아쉬워? 상담은 영양제를 수액으로 맞는 것과 같아서, 어차피 수액 없이 일상을 지내야 하니까….”

하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아?”

하진은 영애의 말을 기다렸다.

“난 네가 네 행동에만 책임졌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상황은 네 선택이 아니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진은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이 있던데. 저도 그래야겠어요.”

그 어느 때보다 하진은 단단해 보였다.

잠시 후 영애가 일어서자 하진도 따라 일어섰다.

둘은 화이팅을 외치고 악수로 작별했다.

거리로 나온 하진은 두리번거렸다.

낯선 동네에 들어선 듯했다.

이젠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하니까.


캐럴도 없는 거리엔 반짝이는 레온사인과 구세군 종소리만 울렸다.

사람들이 자선냄비에 돈을 넣었다.

경제적 가난은 눈에 보여 돕기도 쉽지만, 정서적 가난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도움을 주려고도,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어쩌면 가장 불행한 사람은, 웬만큼 살면서도 실패 정체성에 갇힌 사람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자신의 심리적 욕구를 충족시킬 능력이 없으니 쪼그라든 사람이다.

하진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눈발은 가로등 불빛에 춤추듯 내려앉았다.

그는 구유 안의 아기 예수와 십자가 위의 예수를 떠올렸다.

* * *


상담실에 남은 영애는 일지를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하진이가 잘 지낼 수 있겠지….

물론 힘든 날도 있겠지만, 그 경험을 통해 성장할 수 있겠지?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딸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엄마랑 저녁 먹고 조금 걸을까?”

핸드폰을 손에 든 채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막 문을 나서려는데 정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하진이 없죠?”

“네. 나간 지 시간이 좀 되었는데요.”

”그, 그게. 형이. 하진이 형이.“

정수는 숨을 헐떡이고 얼굴은 창백했다.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대요. 지금 응급실로.“

영애의 손에 쥔 핸드폰이 쿵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주저앉을 듯 휘청였다.

정수가 물었다.

“응급실로 같이 갈래요?”

가야 할까? 아니면 더 혼란만 줄까?

영애는 끝내 고개를 저었다.

“하진이 안전한지만 알려주세요. 그리고…. 언제라도 하진이가 절 찾고 싶으면…. ”

정수가 바람처럼 사라진 상담실.

영애는 떨리는 두 손을 모았다.

허공에 머문 그녀의 시선은 무언의 기도를 담고 있었다.

※독자에게 드리는 질문

당신 삶의 모습은 어떤가요?

성공 정체성을 향해 가고 있나요? 아니면 실패 정체성을 향해 가고 있나요?

당신의 삶은 점점 더 확장되고 있나요? 아니면 점점 더 축소되고 있나요?

당신의 심리적인 욕구를 당신의 힘으로 충족시킬 능력이 향상될수록, 당신은 점점 더 멋진 사람이 될 거예요.

※성공 정체성(Success Identity)

성공 정체성은 외적 성취나 성적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책임 있는 선택과 내적 통제로 욕구를 효과적으로 충족할 때 형성되는 건강한 자아이다.

반대로 외부 통제 심리학에 따라 형성된 실패 정체성은 포기, 증상, 중독 같은 비효율적 행동으로 인해 불행한 관계로 이어진다.

성공 정체성의 핵심은 “나는 내 선택에 책임지면서 사랑도 받을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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