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앞에 선 아이 - 에필로그

행복과 정신건강

by 박광석

새 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 지났다.

영애는 창가에 서서 흩날리는 벚꽃을 바라보았다.

작년 이맘때, 처음으로 상담실 문을 열던 하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분주히 오가는 아이들 속에서 그의 얼굴이 보이는 듯해,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밀려왔다.

영애는 속으로 조용히 기도했다.

하진이가 부디 행복하기를.


창밖을 보며 영애는 지난 상담을 돌아보았다.

일 년 가까이 함께한 시간의 목표는 무엇이었던가?

하진의 행복이었다.


행복.

그녀가 현실치료 상담 공부를 통해 터득한 삶의 철학은 단순했다.

행복이 곧 정신건강이라는 것.


행복이란, 중요한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욕구가 고르게 충족되는 상태이다.

그러니 행복한 사람은 굳이 덧없는 쾌락을 좇지 않아도 된다.

쾌락을 좇기 위해 문제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


하진이….

부모가 행복했더라면.

하진이와 하진이 형이 어땠을까?


부모가 행복한 만큼, 자녀도 행복할 수 있다.

부모가 갖지 못한 것을 자녀에게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신은 불행하면서도 자녀만은 행복하기를 바라는 부모가 많지만, 그건 불가능한 꿈이다.

자녀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부모가 먼저 행복해야 한다.


행복한 아이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하고, 성취동기가 높다.

그럴 때 학업 성취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공부는 결코 요구나 압력으로 얻어지는 공장 생산품이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아이 성적이 좋아지면 행복해질 거다.’라고 믿는다.

사실은 그 반대다.


행복해야 비로소 성적도 오른다.

’어떻게 해야 아이 성적이 오를까?’라는 질문은 ‘어떻게 하면 아이가 더 행복할까?’라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

‘어떻게 하면 아이가 더 행복할까?’라는 질문은 곧 ‘어떻게 하면 부모가 먼저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모든 부모는 저마다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 상처를 직면하고 치유하지 않으면, 현재의 삶에 그 상처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불행은 자녀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러니 먼저, 자신의 상처를 마주해야 한다.

그 상처를 소화하고 품어낼 때, 비로소 따뜻한 연결이 다시 이어진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 삶을 돌보는 일과 분리될 수 없다.

부모의 행복, 그것이야말로 자녀가 삶을 견뎌내고 꽃피울 수 있는 가장 든든한 뿌리다.


특히 부부관계는 자녀에게 가장 직접적인 심리적 환경이다.

배우자에게 쏟는 분노는 사실, 자기 안의 상처를 향한 분노일 때가 많다.

그래서 부부 갈등을 단순히 성격 차이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각자의 상처에 휘둘리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많은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부부가 서로의 관계를 회복할 때만, 그 사랑이 비로소 자녀에게 제대로 전해진다.

부부관계의 회복을 외면하면서, 과연 자녀를 온전히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 * *


한편, 도서관 창가에 앉은 하진은 문제집을 풀다 말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꽃잎이 흩날리다 유리창에 부딪혀 떨어졌다.

떨어진 꽃잎.


그 순간, 형의 부재가 다시 가슴을 저리게 했다.

문득 형이 있는지 둘러본다.

오히려 점점 커져만 가는 주변의 검은 공간.

그 안에서 그는 점점 작아져 사라질 것만 같았다.


하진은 깊은숨을 들이켰다.

이제는 슬픔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끌어안으려 했다.

형이 떠오를 때마다 무너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형이라면 자신에게 무엇을 원했을까.

지금이라도 형을 기쁘게 하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분명 형은 자신이 마냥 슬퍼하기만을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과 형 같은 아이들을 위한 무언가를 하길 원했을 것이다.


저녁이 되어 하진은 도서관을 나오려 가방을 챙겼다.

또래 상담자 역할을 하러 학교에 가기 위해서다.


뜻밖에도 참여 자원자가 6명이나 모였다.

8주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영애 선생님이 도와줬다.

아이들은 리더가 또래라 그런지 부담이 없는 듯, 질문도 잘하고 자기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꺼냈다.


그 모습을 보며 하진은 가슴이 따뜻해졌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아이들이 깨닫고 기뻐하는 모습이, 그를 한층 더 살아있다고 느끼게 했다,


하진이 도서관을 막 나섰을 때였다.

저만치 영애 선생님이 지수와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지수가 영애 선생님의 딸?

예전에 영애 선생님이 딸 문제로 상담을 공부했다고 했지.

그렇다면 지수는 영애 같은 사람을 엄마로 둔 것이었다.

두 사람의 뒷모습만으로도, 지수가 행복해 보이는 게, 당연하다 싶었다.


문득, 예전 기억이 스쳤다.

지수는 자신이 일진이던 시절 함께 어울리던 아이였다.

그때 지수가 물었다.

‘너는 왜 맨날 스니커즈 운동화만 신어?’

‘할머니가 사 주셨거든.’

쭈뼛대며 대답하던 자신에게 지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럴 수 있어.’


하진은 고개를 숙여 발끝을 바라보았다.

스니커즈 운동화 위로 내려앉은 햇살에서 지수의 미소가 보였다.

그 속에는 이제 할머니의 손길뿐만 아니라, 지수가 건넸던 따뜻한 음성까지 스며 있다.


상담실 가까이에서 한 학생과 엄마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학생이 상담실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듯했다.

이걸 기시감이라고 하나?

언젠가 본 것 같은 장면이다.


상담실 옆 건물, 절에 걸린 현수막이 펄럭였다.

그 현수막에 쓰여있는 글자를 읽는다.

‘천 명과 싸워 이기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이 더 위대하다(법구경 103게).’

맞다.

과거의 하진은 늘 천 명의 적과 싸우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오직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다.


이제는 알겠다.

진정한 승리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진정한 자유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될 때 비로소 누릴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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