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 정화를 해야 하는 이유

04. 깨어나기 20

by 쏠이

무의식 정화는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방법론은 아닙니다. 현시점 많은 사람들이 깨어나고 있고 사람들이 깨어나는 것을 돕기 위해 많은 구루들이 책,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깨어남이 시작되었을 때 구루들의 첫 깨어남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보니 구루들은 선택받은 자처럼 한 순간에 삶이 달라지는 사건을 경험한 것 같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처럼 다소 평범한 순간을 통하여 깨달음이 시작될 것입니다.


저는 다소 평범한 깨달음이 시작된 사람으로서(표현을 이렇게 할 뿐 누구나 평범하고 특별합니다. 우월하거나 열등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의식 정화(Shadow work)가 깨어남을 촉진시키는 데에 아주 좋다고 생각합니다.


깨어난다는 것은 아주 단순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어렵게 느껴집니다. 깨어난다는 것은 자신을 참나, 관찰자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에고를 관찰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다시 잠들게 됩니다. 다시 잠들지 않기 위해서 혹은 참나를 아직 인식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 무의식 정화는 큰 도움이 됩니다.


무의식 정화의 과정은 단순히 이렇습니다.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느껴준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주 크게 억눌린 감정들이 있고 그것은 주요 카르마가 되어 삶 전체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우리가 현재 김 아무개라는 인간으로 태어나기 전 어떤 감정을 주로 억누를지 =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지 선택합니다. 이는 전생, 후생이 원인과 결과로 작용합니다. 예로, 아주 큰 무력감을 느끼기로 하고 태어난 사람은 오랜 수감생활을 하게 되거나, 오랜 가정폭력을 당하거나 하는 등의 삶을 창조합니다. 모든 무력감을 느껴주고 나서는 당연히 그만큼의 효용감, 자유로움을 느끼는 삶을 살게 됩니다.


결국에는 삶에서 고통이란 것은 피할 수 없으며, 고통과 쾌락이 반복되는 삶은 영원히 반복될 것입니다(죽음은 없으며 형태의 변형만 있습니다). 이 지독히도 생생한 감정을 관찰자로서 관찰하며 느껴주기 시작하면 죽을 만큼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더 이상 비관적인 생각에 빠지지도 않으며 영원히 이 지옥 같은 현실이 펼쳐질 거라는 속삭임에 속지 않습니다. 그저 지켜보고 느껴주게 됩니다.


깨달음이 시작되었을 때 무의식 정화를 하면서 자신에게 얼마나 억눌린 감정들이 많은지 깨닫게 됩니다. 무의식 정화는 거대하게 뿌리내린 카르마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오열할 수밖에 없으며 육체의 고통도 느껴지게 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감정이 사라지고 평화가 느껴지며 더 이상 같은 기억이 같은 감정을 발현시키지 않음을 지켜보게 됩니다. 예전에는 누가 '너 무슨 대학 나왔어?'라고 묻기만 해도 분노와 수치심이 치밀어 오르던 것이 무의식 정화 이후로는 텅 비어버린 마음으로 '나는 집이 가난해서 대학을 못 나왔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의식 정화를 통해서 거대한 감정들이 녹아 사라지면 실제로 가벼움을 느낍니다. 사는 게 너무 무겁고 두렵기만 하던 에고가 짐을 덜고 편안하게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예전에는 이것도 책임져야 하고 저것도 책임져야 하고 무엇을 시도하기가 두려웠는데 이제는 책임져야 할 것이 없는 느낌으로 가볍게 살아갑니다. (무의식 정화를 하는 초기 1년 정도는 거대한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이 떠오르며, 감정을 유발하는 사건들이 계속 생기기 때문에 힘이 듭니다. 그러나 현실이 감정을 유발해 준다는 것은 더할나위 없이 완벽한 상황입니다.)


큰 감정을 무의식 정화로 녹여내고 나면 작은 감정들은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무의식 정화로 현실이 변하는 것을 지켜보고 나니 무의식 속에 어떤 감정이 있는지 발견하는 것은 삶 그 자체가 됩니다. 더 이상 싫어하는 것을 사랑받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하지 않게 됩니다. 항상 마음을 관찰하다 보니 원하는 일, 즐거운 일이 무엇인지 쉽게 발견하게 되고 더 많이 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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