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운동을 못하는 줄 로만 알고 있었다.
체육은 교과 과정에서 제일 싫은 과목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운동회 하면 팔목에는 항상 4등 도장만 받아오기 일쑤였다. 그리고 중학교 들어가서는 배구 토스 시험 치는 날, 연습을 하던 중 공만 보고 위로 뛰어가다가 넘어져서 앞니를 깨 먹은 이후로는 공을 가지고 뭘 한다는 것에 두려움이 먼저 앞섰다.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나서는 대부분의 학교 교과 과정이 그렇듯이 체육이란 과목은 자습으로 대체되었고 몸을 움직이는 시간보다 앉아서 책만 보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 장비를 가지고 하는 운동 (스키 등) 에는 특별히 노출될 일이 별로 없었고, 그나마 할 줄 아는 운동이라고는 수영뿐이었다. (그렇다고 부산 사람이기 때문도 아니다..) 그런 상태에서 성인이 되고, 대학교를 들어가고, 하는 거라곤 술 마시고 노는 것뿐, 아웃도어 액티비티에서 더욱더 멀어져 갔다. 그렇게 대학교 졸업을 하고 슬로바키아에 오게 되었다.
슬로바키아에 오고 나서 보니, 그렇게 내가 원하던 '여유가 있는, 워라밸이 있는 삶'의 모습이긴 한데, 대도시에서와 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부산에서 자랐고,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 나는 전형적인 '시티 걸'의 모습이었다. 항상 쫓기듯이 무언가를 해왔고, 잠깐의 틈이 나면 즐기는 것이라고는 친구들을 만나 맛집이나, 카페, 새로이 부상하는 복합 문화 공간 또는 서점, 영화관 등에 가는 것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종종 운동이나, 춤을 배우러 다니긴 했지만, 지속적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여기 브라티슬라바에서는 내가 여가 시간에 즐기던 것을 거의 할 수가 없었다. 서울처럼 역동적인 도시도 아니었고, 문화적인 이벤트들이 매일매일 생기는 도시도 아니었다. 설사 있었더라 치더라도 언어의 장벽 때문에 크게 즐길 수도 없었다. 그리고 어떤 새로운 걸 배워보려고 해도 많은 수업이 오후 5시 시작이 가장 마지막 클래스였다. (회사는 6시에 마침) 배움의 기회조차도 칼같이 선생님의 워라밸에 맞춰진, 이 곳, 브라티슬라바, 유럽에서 가장 긴 다뉴브 강이 유유자적 흘러 지나가는 그런 도시였다.
슬로바키아 회사 동료에게 물었다. 너네는 일 마치고 뭐하니? 물으면. 대부분의 대답이 운동이었다. 운동이라.. 해본 운동이라고는 깨작깨작 다녔던 피트니스가 다인데.. 이를 어쩐담. 그렇게 나의 다양한 시도는 시작되었다. 처음 1-2년은 정말 많은 것을 시도했다. 피트니스에서 제공하는 그룹 액티비티 (줌바, 태보, 요가 등)부터 자전거, 인라인 스케이트, 스쿼시 등 수많은 운동들이 나를 거쳐갔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내가 즐기면서 하는 것을 찾기란 어려웠다. 슬로바키아 사람들이랑 그룹으로 하다 보니, 그룹 운동인데도 불구하고 더욱더 외로워지는 경험(?)을 하였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 갈팡질팡하지 말고 조금 무모하지만 목표를 잡기로 했다.
슬로바키아 동북부 타트라 산맥에서 브라티슬라바까지 릴레이 마라톤에 참여하는 것
-총 거리 345km, 12명의 러너들이 릴레이 형식으로 약 10km씩 쉼 없이 뛰는 마라톤. 한 사람당 총 30km
우연히 슬로바키아 친구에게 듣게 된 마라톤이었다. 하루는 그 친구와 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하는 말이 본인이 주장이 되어서, 릴레이 마라톤에 참가할 팀원을 모집한다고 했다. 설명을 듣는 와중에 대뜸, 나도 참가하겠노라 했다. 내가 어쩌다가 그렇게 툭- 대답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마라톤은커녕 5킬로도 뛰어 본 적이 없었던 나였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릴레이 마라톤을 대비한 운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팀원들에게 민폐가 될 순 없었기에. 기본적인 체력을 쌓기 위해서 퍼스널 트레이닝을 하기로 했다. 여기에서는 보통 시간당 15유로 (한화 2만 원 안짝) 하기 때문에, 조금 부담 없이 받을 수 있었다. 8월이 마라톤이니, 4월부터 시작해서 4개월 정도를 트레이닝을 받으며, 체력 키우는 것에 대한 감을 익혀나갔다. 일반 퍼스널 트레이닝과는 다르게, 트레이닝을 야외 공원에서 진행했는데 나무를 이용하기도 하고, 근처 벤치 등등 주변의 사물을 이용해서 하다 보니, 지루하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결전의 날인 릴레이 마라톤 날이 다가왔고, 토요일 아침부터 시작이니, 금요일 퇴근 후, 단체로 두 봉고차에 나누어 타고 릴레이 마라톤의 시작점인 타트라 산맥의 야스나 (Jasna) 밸리에 도착했다. 11명의 슬로바키아 사람과 나, 도착한 숙소에는 마라톤을 참여하는 사람들이 이미 와있었고,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때 당시엔, 내일 당장 마라톤 시작인데 저렇게 술을 마시고 있는 게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그들에게는 재밌는 이벤트 거리였지만, 나에게는 심히 긴장되는 날이었고, 대화들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긴장이 되어 잠이 드는 둥 마는 둥 하고 나니 날이 밝았다.
나는 10번째 주자로, 오전 8시에 1번 주자가 스타트를 끊은 후, 약 오후 3시경, 나의 첫 러닝이 시작되었다. 가는 날이 장날인지, 8월 중순 낮의 온도는 30 도 이상 육박했고, 생전 처음 가는 동네를 10킬로 뛰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총 3라운드 중 첫 라운드 일 뿐인데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고, 이를 꽉 물고 죽을 상을 하고 견디다 보니 점점 바통 터치 라인은 가까워졌다. 바통 터치를 하고 난 이후에는 혼이 나갔던 것 같다. 이걸 내가 왜 하고 있나 싶기도 했다.
다음 2라운드는 12시간 뒤인, 약 새벽 3시경이었다. 지정된 장소로 이동하여 작은 마을 학교 운동장에 침낭을 펴고 일명 비박을 하게 되었다. 누워서 별을 보는 데 뭔가 기분이 묘했다. 내가 릴레이 마라톤을 참가한 것도 신기했고, 그것도 슬로바키아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팀에 끼게 되어서, 어느 아무개 슬로바키아 시골 동네 마을 학교 운동장에 비박을 하고 있는 것도,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살짝 감성적이게 되려 던 차, 잠이 들었고 약 3시경, 알람과 함께 곧 내 차례라는 소식과 함께 비몽 사몽 일어났다. 9번 주자의 바통을 받고 칠흑 같은 어둠을 헤드 라이트에만 의존한 채 뛰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딘지, 그다음 마을은 언제쯤 나타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헤드 라이트가 비춰주는 몇 미터 앞만을 바라보면서 뛰었다. 신기하게도 뛰면서 아무런 생각이 없어졌고, 2라운드 뛰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 전날 오후에 뛸 때 보다 훨씬 몸이 가벼웠다. 내가 뛰는 발소리만을 들으면서 그렇게 어둠 속을 헤쳐나갔다.
3라운드가 되기 전, 또 다른 마을의 학교 강당에서 휴식을 취하고, 공용 샤워실에서 뜨근한 물에 재빠르게 샤워도 할 수 있었다. 며칠 간 긴장한 탓에 피로가 미친 듯이 엄습해왔고, 졸렸지만 눈이 부시게 밝은 날이라 쉬는 동안 제대로 잘 수도 없었다. 그렇게 오후 2시쯤 마지막 라운드였다. 34도를 육박하고, 브라티슬라바 근교로 거의 다 왔기에, 대부분이 아스팔트 길이었고, 별다른 그늘도 없었다. 뛰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내 다리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종종 보이는 응원단들, 그리고 물 뿌려 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열기를 식힐 수 있었고, 한편으로는 물을 가득 머금은 운동화를 신고, 찍찍- 소리를 내며 뛰었다. 이건 정말 미친 짓이야,를 연발하며, 헛웃음이 터져나오면서.
1번 주자가 출발한 지, 33시간 만에 우리는 345km 릴레이 마라톤을 완주했다!
피니쉬 라인 500m가량 전부터는 팀원들 다 같이 모여 마지막 주자와 함께 뛰었다. 단상에 올라 사진을 찍을 때 까지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해냈어! 우리가 해냈어!
내가 스포츠에 있어서, 인생 처음으로 목표를 세우고 이뤄 낸 성과였다.
몇몇 주변 한국 분들은 별 걸 다한다 했지만 슬로바키아 사람들 모두, 멋지다고, 할 수 있다고 응원해 주었다. 릴레이 마라톤 완주를 계기로 자신감이 업그레이드되면서 새로운 스포츠를 시도하는 데에 있어 겁도 없어졌고, 점점 운동이 주는 즐거움에 빠지게 되었다. 겨울철 이곳에서는 빠질 수 없는 스포츠인 스키도 좀 더 자신감을 가지고 배울 수 있었고, 아직도 속도에 대한 두려움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컨트롤할 수 있다'라는 믿음이 생겼다. 날이 좋은 봄, 가을이면 골프 연습도 하고, 필드도 종종 나간다. 여름에는 호숫가에 가서 수영도 하고 강가에서는 카약도 즐기곤 한다.
사계절에 맞춰 본인이 즐길 수 있는 운동이 있다는 것은 '여유 있는 삶'의 첫 번째 증명 같은 셈이고, 내가 원했던 나의 삶의 모습이었다. 한국에서는 절대로 이렇게 즐길 수 없었을 것이다. 시간, 돈 둘 다 없었을 테니까. 한국보다 훨씬 저렴하게 아웃도어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는 것은 슬로바키아에서 지내는 데에 있어서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스포츠를 즐기는 것 외에, 크게 할 거리가 없다는 이 나라의 단점이 나에게는 새로운 내 모습을 발견하게 해 준, 나에 대한 스스로의 편견을 깨게 해 준 고마운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