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랑 수영할래?

by 지호

수영장에서 선생님 준다고 돈 걷고, 신규 회원 들어오면 텃세 부린다는데.

지호님이 다니는 수영장은 그런 거 없어요?

ㅡ 아, 저희 수영장은 조용히 수영만 하고 그런 거 전혀 없던데요!


어느 수영장이나 생태계가 있다. 주 3회 수영에 10개월째 다니는 나는 아마 그 생태계에 잘 적응했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듣는 수영 강습반은 오전 9시 주부반. 여성만 강습을 들을 수 있는 이 시간대에는 사실 가정주부가 아닌 분도 있고 자녀가 없는 회원도 있을 테다. 주부반이라는 다소 성역할고정관념에 기반한 반 이름에 대한 현장 분위기는,

응! 나 주분데 뭐 어쩌라고?


평균적으로 40대~90대 회원님들이 분포한 이 아침 시간대 주부반 수업에서 회원들 간의 호칭은 일단 ‘언니’다. 그 안에서 나는 34살 막내. 애들 학교 보내고, 식구 아침 해주고 모이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시간대. 다른 회원님들은 나에 대해 수영장과 샤워실에서 드러나는 수많은 타투의 흔적을 보시며 다소 아리까리하지만 젊은 애기엄마쯤으로 알고 있으신 것 같긴 하다. 각 수영장마다 시설은 비슷한 구조와 시스템을 가졌고 잘 보면 대화 내용도 유사한 점이 많은데.


“나 처녀 때는 키 큰 남자가 좋은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쓸데없이 밥만 많이 먹고 나이 먹으니까 간병할 때 무거워서 별로라니까~”

맞아 맞아 하면서 까르르 공감하는 회원님들.

“그것도 죽으면 못해~ 있을 때나 챙겨주지!”

내용으로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는 언니들의 나잇대. 나는 회원 카드 찍고 들어온 탈의실에서 옷 벗으면부터 시작되는 회원님들의 농익은 유머를 주의 깊게 들으며 샤워실로 직행한다. 샤워실에는 항상 긴 줄이 이어져 있다. 수강강습 전 샤워하는 사람들을 먼저 들어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기도 하고. 간단한 샤워와 동시에 온몸에 비누칠을 하고 끙끙 거리며 수영복을 입는다. 꼬인 등 끈 때문에 끙끙거릴 때 모르는 손이 쑤욱 들어와도 놀라지 마시라. 뒤에 서있던 회원님이 엉킨 끈을 정리해 줄 테니까. 혹시 건강상 걸음이 아주 느리거나 팔을 꼬는 자세가 불편해도 걱정하지 말 것. 시간이 걸려도 ‘손’들이 도와줘서 수영복과 모자를 완벽하게 쓰고 수영장으로 도착하게 될 것이다.


“언니~ 왜 그저께 안 나왔어요~.” “나 어제 애들 시험이 있어서 데려다주느라고~ 근데 있잖아...” 못 본 하루 새에 따라잡아야 할 소식들이 이렇게 많을 수 있을까? 와글와글 하던 수영장도 9시 정각, 강사의 준비 운동이 시작되면 일동 집중한다. 우리 반의 두 레일을 담당하고 있는 수영 선생님은 젊은 남자 강사로 언니들한테는 아들뻘 핏덩어리라는 말을 듣는 작은 체구의 열정 넘치는 강사이다. 야무진 이 강사는 매일 새로운 영법 연습 동작과 다양한 수영 부품 활용을 강습에 적용해 질리지 않게 수업을 구성하고, 회원 한 명 한 명 동작을 세심하게 잡아주고 실력에 대한 피드백을 틈틈이 언급, 매일 4타임 강습을 주 5회 하면서 누가 언제 빠졌는지, 연습에 왔는지 안 왔는지도 줄줄 꿰고 있다. 덕분에 30명 정원 수영 강습은 출석률도 좋고 기존 회원이 이탈하지 않아 신규 자리가 나지 않는 시간대로 유명하다. 한 번 놓치면 수강 신청이 어렵기 때문에 사정 때문에 1~2개월 빠질 때도 사람들은 기존 회원 재수강 기간에 우선 결제하고 본다. 그럴만하다. 이 선생님 덕분에 나도 수영 센터의 젊은 남자 강사들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고 더 열심히 수업에 나오게 되었으며 수영장도 정착하게 되었으니까.

“잘 모르겠는데 다시 한번 보여주세요~”

강습 내내 적절한 반말과 존대를 섞어 회원들에게 지시하는 강사의 '호랑이 말투'에 아무도 기분 상해하는 사람은 없다. “아니! 이걸 왜 한 번에 못 알아들어!!!” 펄쩍거리며 다시 한번 강사가 시범 동작을 하자 까르르~귀엽다~ 하며 회원님들의 웃음이 터진다. 그런 부정할 수 없는 주책에 껴서 나도 나보다 조금 어린 저 핏덩어리를 가리키며 태연스럽게 깔깔 웃는다.




“너무 죄송해요, 발에 맞아서 아프셨죠?”

“아유~ 내가 아팠으면 자기 발을 요렇게 요렇게 콱 잡고 안 놔줬지~” 웃으며 내 양 발을 손으로 꽉 잡는 시늉을 하는 처음 안면을 튼 회원님의 스킨십, 수영에 바치는 열정만큼 서로에게 훅 다가오는 뜨끈한 친밀감에 나는 오늘도 녹고 만다.


[내년엔 선생님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우리 서명을 해서 센터에 제출해 봅시다! 수업 끝나고 테이블에 있는 종이에 서명하고 가주세요 여러분.]

한 달에 한 번 하는 티타임 장소를 봤을 때처럼, 송년회를 한다는 소식을 안내받았을 때처럼, 나는 단체 톡방의 메시지를 보고 이번 주는 수업 끝나고 얼른 튀어야겠다고 생각한다. 한 레일에 고이지 않도록 매 년 선생님을 무작위로 배정하는 센터 규칙상 새해가 되면 다른 선생님으로 바뀔 수 있다는 나에게도 청천벽력인 소식을 듣고는, ‘그렇지만 그 선생님한테 계속 배울 수만 있다면...’이라고 생각하는 나. 수영장이 돌아가는 작은 생태계 안에서 때로는 내가 동조하는 주책도,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수 있는 오지랖도 발생하곤 하지만 나는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다’는 선을 그려놓곤 한다.



수영을 꼭 배워보세요. 개인레슨도 좋지만 수영장에 다녀보세요 ㅡ 라고 나는 음흉하게 말한다. 겪고 나서는 나에겐 안 맞다고 줄행랑칠지도 모르는 게 수영장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더 큰 장점에 매료될 수 있으니까 권하고 본다. 수영인으로서 수영의 장점을 열거하자면 참 많지만, 건강해지는 신체와 성취감 말고도 내가 알게 된 수영의 특 장점은 수영장에서 찾은 게 아닐까? 바로 발랄하고 꾸준한 '언니'들을 보며 나이 드는 게 기대된다는 점. 수영장에는 10년, 20년, 30년 이상 수영한 분들이 많고 물밖에서는 여러 언니들의 '손'과 걷는 보조기구의 도움이 필요한 최고참 언니도 수영장에서는 그만의 호흡으로 혼자서 물속을 나아간다. 수모에 물안경까지 쓰면 잘난 사람 하나 없지만 그래서 더 자유롭게 만끽하는 움직임, 나이로도 체형으로도 겹치지 않는 형형색색 저마다의 수영복 취향, 가볍고 무방비한 웃음 사이에서 어느새 고민도 씻겨나가고 즐거움에 빠져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라면 나는 90세가 되어도 의심 없이 수영장에 다니고 있을것 같다. 수영복을 고르고, 아무 의심 없이 도움의 손길을 받고, 나의 와글와글한 일상을 만끽하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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