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 주변의 남자들이 신경 쓰여 잠을 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친한 동생이라든가, 대학 동기라든가, 아는 오빠라든가, 기타 등등(기타로 퉁 쳐서 죄송합니다). 새삼스럽지만 세상의 절반이 남자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통감하는 중이다.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아도 잠은 잘 잔다며 자랑하고 다닌 1인으로서,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을까 싶다. 진심으로.
물론 내게도 ‘나는 그런 거 몰라요’ 하던 평화로운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내 생애 첫 여자 친구가
“너는 내가 다른 남자랑 술 마신다는데 걱정도 안 돼?”
라는 말로 포문을 열어젖힌 그 순간, 봄날 같던 세상이 하루아침에 뒤집어지고 말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겪는 극심한 내전이 발발되었고, 한쪽이 영영 지도에서 지워져야만 끝날 것 같은 포격이 계속되었다. 하늘은 포연으로 새까매진 지 오래. 더 이상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캄캄하던 날들이었다…….
종국에야 다시 잘해 보자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게 되었지만, 내 안의 어딘가는 영원히 폐허가 된 기분이었다. 이곳에서다시 무언가를 짓게 될 수 있을까, 이곳에서 다시한 번 희망을 이야기하게 될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만큼. 그런데 신기하게도―평소 적응이 빠른 편이 아닌데도―생존조차 불가능할 것 같던 전쟁터에서 나는 이미 뭔가를 결심하고 있었다.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질투라는 걸 한번 배워 보자고. 단지 배우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얼른, 냉큼, 최대한 빨리 실전에도 적용해 보자고. 아무래도, 당시의 나는 절실했던 모양이다. 그즈음 내게 여자 친구란 세상의 전부였고, 그때는 혁신(?)적인 변화 없이는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였으니까.
결국 첫사랑은 떠났고 하나뿐일 거라 생각했던 세상도 여러 번 바뀌었다. 감정도 없이 질투를 '연기'해야 하는 상황만큼은 좀처럼 뒤바뀌지 않은 채. 비록 구체적인 언어는 달랐어도 질투가 사랑의 증거로 통하는 문화만은 여전했기에, 의무적으로 삐치고 의도적으로 화내면서 툭하면 의심의 눈초리까지 받아야 하는 불온한 시대가 지속되었다. "너 정말, 나 사랑하는 거 맞아?" 그때마다 물론 사랑한다고 대답했지만…….
그런데 요즘 들어 ‘진짜’로 질투가 늘었다. 이제야 연기에 진심을 담게 된 수준이랄까. 메서드 연기에 물이 올랐는지, 정말 질투를 하고 있는 게 맞나 의심스러운 수준을 넘어, 그러니까 삐치는 척이 아니라 진심으로 빡치는 경우도 종종 생겨 나게되었다.
문제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문화권이 더 이상 질투를 미덕으로 삼지 않는 세계라는 점이다. 불행(?)하게도 지금의 여자 친구는 질투 같은 것으로 사랑의 증빙을 삼지 않는 취향이라……(도대체 남자 친구의 질투를 보며 흐뭇해하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더군다나, 나보다 먼저 이 세상을 살았던 선배님들 역시 한 질투하셨다고들 하니, 이거 눈치도 없이 막차를 탔나 싶어 겨드랑이에 식은땀이 줄줄 흐를 지경이다.
다행히 원체 평화로웠던 세상이라 이 몸의 격렬한 질투질 따위 너그러이 용서되는 분위기지만, 여태껏 어렵게 따놓은 점수를―아마도 조금이겠죠―혹시라도 몽땅 날려 먹게 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요즘이다. 한창 설레는 마음으로 썸 타던 시절, 지금의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기 위해 쿨한 척 지적인 척 온갖 설레발은 다 치며 연기혼을 불태웠던 나. 지금은 쿨하긴커녕 구질구질 지적질만 해대고 있으니, 이제껏 쌓은 점수는 몰라도 앞으로 멋있는 척하기는 다 글렀다는 전망이 든다. 심히 우울해지는 저녁이다.
딱히 궁금한 것은 아니지만, 나의 첫사랑 그녀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혹시 그녀를 세상의 전부로 여기는 누군가에게 “질투 같은 건 딱 질색이야.”라며 인정사정없이 폭격을 퍼부어 대고 있는 건 아니겠죠. 그렇다면 좀 억울할 것 같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