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돈을 잃는다면
사실 아침에 나는 돈을 잃어버렸었다. 일어나서 캐리어를 확인하니 환전해 갔던 현금 봉투가 사라졌었다. 아무리 짐을 뒤져봐도 나오지 않았다. 에어비앤비로 독채를 빌렸기에 좀도둑 외에는 다른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생각난 사람은 아내와 무라카미 하루키였다.
아내는 에어비앤비로 간 집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던 걸 들었기 때문에 호텔로 가는 걸 추천했다. 나는 전 세계에서 에어비앤비가 벌어들이는 돈을 얘기하며 그렇게 문제가 많다면 이렇게 많은 돈을 벌 수 없을 거라고 말하며 아내를 안심시켰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돈이 사라지니 할 말이 없었다. 역시 아내 말을 잘 들어야 잘 사는 법이었다.
동시에 아내가 위로할 말도 떠올랐다. 내 옆에 있었다면 분명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 정도 일로 오늘을 낭비하지 마. 이런 일이 당신 여행을 망치게 하지 마. 어쩔 수 없는 거야. 지금은 여행을 즐겨.
다행이다. 내게 이렇게 말해줄 아내가 있어서.
하루키의 에세이책 <시드니!>를 보면 호텔에서 그의 노트북이 없어진 에피소드가 나온다. 맙소사, 호텔에서 대가의 노트북이 도난당하다니. 그 순간 그의 기분은 실제로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이 소소하면서 확실한 불행을 마치 아침엔 시리얼 먹었다는 식으로 담담하게 썼다.
그는 시드니에서 핸드폰도 잃어버린다. 분실부터 다시 찾는 과정까지 그의 글에서 초조함이나 불안 같은 건 느낄 수 없다. 하루키는 마음을 단단하게 해서 작가의 삶을 지키고 있던 건 아닐까.
하루키도 그렇게 담담했는데 나도 담담하게 반응할 수 있다. 인생은 해석이다. 여행도 해석이다. 에피소드 하나 생겼다. 그렇게 생각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더 하지 않도록 얼른 밖으로 나갔다.
지금 내게 남은 현금은 얼마 없지만 카드가 있으니 괜찮다. 앞으로 좀 아끼자. 아주 싼 커피와 에그타르트가 있지 않은가.
저녁 먹기 전 숙소에 들렀을 때 다시 캐리어를 뒤져보니 봉투가 툭 나왔다. 아침에 다 뒤졌을 때는 분명히 없던 봉투가 어떻게 이렇게 쉽게 재등장한 걸까.
다시 찾은 돈에 마음에 화사함이 돌았다.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니, 그냥 맘 편하게 돈을 쓸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 혼자 온 여행이라 돈을 쓸 일이 별로 없겠구나 싶었는데 이 돈을 제대로 쓰고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돈이 없을 때 좌절하지 않았고, 돈이 있을 때 시간을 더 잘 쓰자는 마음을 가졌던 하루였다. 아마 예전의 나였다면 하루 종일 짜증과 자책을 했으리라. 그러나 조금은 더 단단해졌음을 확인했다. 아내와 하루키 덕분에.
ps.
포르투갈 여행에서 생각한 것들 1편은 여기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