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에 도착한 밤
리스본은 조용한 밤으로 날 환영했다. 집의 현관문을 열고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리스본 숙소 문을 열기까지 24시간이 걸렸다.
공항에서 지하철역으로 내려가 티켓을 사는데 얼마짜리를 사야 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아 난감했다. 어느 나라를 가든 지하철역에서 티켓을 살 때 생각이 많아진다. 그 도시의 시민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이방인에게 가장 낯설게 느껴지게 된다. 일상에서 쉽기에 일상을 침범한 타인에게 친절한 설명은 주어지지 않는다.
난 자립심이 강하니까 스스로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눌러보지만 여전히 미궁 속에 있다. 밤에 도착해서 지하철표 자판기 앞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결국 불친절해 보이는 직원에게 물어보니 이런 것도 못 하나 싶은 표정의 눈살로 그가 자판기를 툭툭 누르고 나서야 나는 티켓을 받았다. (이때도 신용카드를 넣고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과정이 있었는데 이게 맞나 싶어서 당황했다)
마흔 넘어 혼자 하는 여행에 뭐든 깔끔하게 해결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지만 여전히 여행은 나를 어린아이로 돌려놓는다. 지하철역 하나하나 지날 때마다 역이름을 하나씩 읽어보며 내가 어디쯤 왔나 하는 모습은 우리집 막내와 다를 바 없었다.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숙소는 리스본 알파마 지역 한가운데 있었다. 에어비앤비를 처음으로 이용해 본 나는 일부러 가장 그 지역스러운 집을 골랐다. 알파마는 리스본의 구시가지로 1500년대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주요 관광지가 모여 있는 지역이다. 로마가 정복했을 당시 마을의 모습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곳이었다.
자정이 지난 시간 아무도 없는 알파마에 한 한국인이 도착한다. 차 한 대도 제대로 지나가지 못할 거 같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건물 외벽에 반사되어 낭만적인 골목이 되었지만, 로마의 돌길 위로 캐리어가 지나가는 소리가 온 동네를 울리는 것 같아 쑥스러웠다.
리스본 대지진 때도 살아남은 역사가 깊은 곳이라는 말의 뜻은 현대적인 길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구글맵을 보며 가는 길은 내게 과연 맞는 길로 가는가 하는 질문을 계속하게 만들었다.
밤늦게 가는 남자와 좁을 골목에서 마주쳤을 때 서로 경계하는 게 느껴졌다. 사실 밤에도 안정적으로 사는 사람의 지역을 침범한 건 나였음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꾹 쥐고 스쳐 지나갔다.
꽤 아름다운 길이라고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긴장하는 마음으로 겨우 숙소를 찾았다. 숙소 앞에 작은 의자에는 연인으로 보이는 (혹은 썸 타는 사이) 남녀가 둘만의 말을 속삭이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시간을 쌓는 곳이니 숙소가 있는 곳이 안전하겠다는 생각이 찾아왔다.
숙소 앞에 서니 그제야 피곤이 몰려왔는데 문을 열 때 애를 좀 먹었다. 열쇠를 아무리 돌려도 열리지 않는 문. 왼쪽으로 끝까지 돌려보기도 하고, 오른쪽으로 끝까지 돌려보기도 하고, 집주인이 보내준 유튜브도 다시 보고, 또다시 돌리고. 아, 에어비앤비 사고사례를 몇 번 들어보긴 했는데 그게 나의 사연이 될 줄이야. 에어비앤비 예약을 말렸던 아내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기까지 했다.
딸깍. 열렸다. 열린 건 기쁜 일이지만 왜 열렸는지 모르는 건 앞으로 더 막막하다. 들어갔다가 갇히는 건 아닐까. 몇 번 다시 돌려본 끝에 문을 살짝 당긴 상태에서 열쇠를 끝까지 돌린 상태에서 밀어야 열린다는 걸 알았다. 오래된 마을의 오래된 집의 오래된 문이었다.
시간의 문을 열고 역사 속 도시로 들어가 첫 잠을 자기까지는 이렇게 쉽지 않은 길이었다. 그래도 결국 갤럭시와 구글과 에어비앤비라는 현대 문명의 기술 덕분에 드디어 양말을 벗고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한 사람의 몸은 피곤했지만 정신은 더 깨어나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