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주 근무시간을 따져보니 50시간이 넘는다. 급한 일이 있어서 정신없이 하다 보니 회사에 12시간 넘게 있기도 했다. 그 와중에 코로나 여파로 아이들 학교가 예상치 않게 일찍 봄방학에 들어간 데다, 막내는 감기로 열나고 기침해서 어린이집 등원을 못해서, 몸도 마음도 더 바빴던 일주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개인생활은 엉망이었다. 애들 아침, 점심도 제대로 못 챙기고 출근하기 바빴고, 퇴근해서는 이미 밤 10시가 넘어서 아이들과 인사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지나가 버릴 때도 많았다. 연초에 다짐했던 매일 일기 쓰기도, 조금씩이라도 책을 읽겠다는 목표도, 한 달 프로젝트로 진행하고 있던 하루에 한 개 버리기 미션도, 다 뒷전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평일이 지나가고, 금요일 밤까지 야근을 끝내고, 드디어 한 숨 돌릴 수 있는 토요일이 되었다. 평소 이것저것 알아보고 놀러, 구경하러, 체험하러 어디 나가자고 하는 편이지만, 이번 주는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냥 쉬어야겠다며 맥없이 누워있다가 눈에 띄는 소식을 발견했다. 평소 활동하던 동호회에서 번개를 한다는 것이다. 무릇 주말의 외출이란 남편과 일정을 조율해가며 의논해야 하는 일이지만, 이 날 나는 그냥 홀린 듯이 번개에 참석하겠다고 답글을 남겼다. 탈탈 털린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이런 것이라며.
그렇게 나간 번개 자리에서 열두 명의 남녀가 만났다. 우리는 역 근처의 중국집에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고, 바로 목적지로 이동했다. 멀뚱히 자리 잡고 앉은 우리는 정식으로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미선씨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낮사람입니다."
그리고, 호스트가 첫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다. 우리 모임의 정체는, 낮사람이라는 악보 제작자를 중심으로 유튜브 방송과 카페와 오픈 채팅방에서 만나는 사이이다. 멤버들의 연령은 대체로 40대 전후, 일 년에 한두 번 같이 1박 2일 엠티도 가고, 공연장 빌려서 우리끼리 연주회를 하기도 한다. 악기 전공자부터, 악보 볼 줄 모르는 사람까지 함께하고 있다.
우리가 듣고 연주하는 노래는 고급진 클래식이 아니라 철 지난 대중가요다. 이승환, 공일오비, 윤종신, 장혜진, K2, 뱅크...... 요즘 슈가맨이라는 프로에 나오는 그런 사람들의 그때 그 노래를 함께 듣고, 그 감성에 빠져든다. 낮사람은 피아노 연주로 편곡해서 악보를 내는데, 어릴 때 체르니 30번 치다가 그만두고 20년째 피아노를 안 만져본 나도 연습하면 따라 칠 수 있고(물론 많이 연습해야 한다.), 어느 정도 완곡을 하면 꽤나 그럴듯한 연주가 된다. (어릴 때 사서 치던 노란색 낱장 을지 악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악보 퀄리티다.)
이렇게 모이면 우리는 각자 연습하던 곡을 나와서 연주하기도 한다. 범접할 수 없는 연주를 하는 전공자도 있지만, 나 같은 아마추어도 부담 없이 칠 수 있는 분위기다. 우리는 평가하려고 모인 게 아니라 좋은 노래를 그저 즐기려고 만난 거니까. 피아노를 잘 못 치더라도, 중간에 자꾸 틀리더라도, 진심을 담아 진지하게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감동이 느껴지는 법이다. 나도 한 곡 연주했다. 연습이 부족해서 떠듬대기는 했지만, 듣는 이들도 내가 얼마나 이 곡을 좋아하는지, 잘 치려고 노력해왔는지 느꼈는지 열렬한 박수를 쳐 주었다.
낮사람은 어떤 노래가 듣고 싶다고 주문을 하면, 그 노래를 바로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이 있다. 그저 멜로디를 뚱땅거리는 게 아니라, 감성 돋는 연주로 재해석을 해주는데 듣고 있자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모르던 노래인데 연주가 좋아서 원곡을 찾아 듣게 되는 경우도 있고, 알던 노래인데 피아노 연주로 들으니 색다르게 느껴져서 악보를 찾아 연습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재발견하는 노래들도 좋지만, 제일 좋은 건 원래 좋아했던 노래를 더 좋은 피아노 연주로 듣는 경우이다. 이 날 유독, 낮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이승환의 곡을 많이 연주해 주어서 정말 좋았다. 이승환 콘서트를 가려고 예매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취소되어서 아쉬웠던 나에게, 선물같이 다가온 연주였다. 힐링이 따로 있나. 이런 게 힐링이지.
그렇게 몇 시간을 연주하고, 감상하고, 노래하고, 떼창 했다. 피곤하고 두통도 심해서 컨디션이 엉망이었는데 좋은 연주를 들을 때는 신기하게 정신이 번쩍 들면서 두통이 가신다. 덕분에 메말랐던 감성이 충전된다. 어느덧 밤 10시가 넘었고, 우리는 떼창을 하면서 아쉽게 자리를 마무리했다.
돌아오는 길, 체력이 바닥나서 지하철에서 멀미할 지경이다. 그래도 나오길 참 잘했다 싶고, 마음은 풍요롭다. 와이프의 취미생활을 이해해주고 인정해주고 아이들과 함께 해준 신랑에게 너무 고맙고, 엄마가 이런 일로 집을 비울 때 잘 다녀오라고 인사해주는 아이들도 고맙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남은 일요일에는 분리수거하고 화장실 청소하고 쌓여있는 설거지 하고 아이들 숙제 진도도 확인하고, 다음 주에 있는 중요한 보고는 잘 준비해서 마무리해야지. 좋아하는 일을 한 덕분에, 일상을 반복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