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어렵고, 남에겐 쉬운 일

by 미선씨

작년 한 해, 주말마다 텃밭을 가꾸곤 했었다. 텃밭교육에서 받은 씨감자와 당근도 심어보고, 모종 가게에서 토마토 모종과 상추 씨앗도 사다 심어보고, 집에서 먹고 뱉은 수박씨도 혹시 하며 뿌려놓았다. 초보 도시농부의 첫 농사였지만, 제법 많은 작물을 제법 잘 키워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가서 작물이 변화한 걸 보는 재미도 있었고, 농사가 얼마나 고된 일인지를 몸소 느끼기도 해서 보람도 있었다.


아마 요맘때쯤이었나 보다. 대충 던져놓은 수박씨에서 거짓말같이 덩굴 같은 싹이 자라나더니, 구불구불 줄기 사이사이에 꽃이 피고 꽃 꽁무니에 조그마한 수박이 달리기 시작했다. 수박씨에서 수박이 나는 게 당연해 보이겠지만, 내가 먹다가 뱉은 수박씨에서 싹이 나는 걸 내 눈으로 보는 경험은 생경하리만치 신기했다. 씨앗이나 모종을 사서 심은 것보다 더 정이 간달까. 우리 가족은 밭에 갈 때마다 수박을 유독 애지중지 했다. 옆집 텃밭을 참고해 보니 수박이 물에 닿으면 썩는 것 같길래 수박이 달린 데마다 수박받침대를 만들어 주고, 누가 훔쳐갈까 따먹을까 싶어 고구마 잎으로 잘 가려주면서.


그날도, 수박이 어디 달렸나 얼마나 컸나를 유심히 살펴보던 중이었다. 근처에서 텃밭을 하시던 노부부가 지나가시면서 초짜 느낌이 물씬 나는 우리를 보더니, 답답했는지 이런저런 말씀을 해주신다.

"그거 수박 그러면 안되는데. 다 따버리고 줄기마다 한 개씩만 남겨요. 그래야 먹어 "


'이제 겨우 열매를 맺었는데, 이렇게 조그맣고 귀여운 수박을 따버리라고?'

우리 부부가 어벙벙하게 있으니까 아주머니가 팔을 걷어붙이고 밭에 들어오셨다.


" 이게 메인 줄기고 이게 곁가지인데, 수박이거 작은 것만 달린 줄기는 그냥 잘라버려야 해. 이것도, 이것도, 이건 자르고, 이것도 잘라내고, 요 줄기만 하나 남기면 되겠네. 아이고, 이거 수박 많이 달려서 아까워서 어쩐대. 이게 크니까 이 줄기만 남기고 나머지는 자르자고. 이렇게 해야 수박이 하나라도 자라지, 아니면 다 안 자라."


아, 그간 수박이 많이 달리긴 하는데 크기가 영 커지질 않아서 이상하게 생각하던 참이었다. 영양이 분산돼서 그런 거구나. 그렇다고 이 귀여운 수박, 잘 달리지도 않는 수박을 가차 없이 잘라버리는 건 내 손으로는 차마 못하겠는 일이었다. 수박 줄기를 정리해주시던 아주머니도 '아이고 아까워'를 연발하며 줄기를 쳐주셨는데, 옆에서 보고 계시던 아저씨가 한마디 하셨다.


" 그거 그거, 그거 남겨봐야 안 자란다니까. 아 여보 그거 다 잘라버려. 고거 딱 하나만 남기면 되겠네. 원래 솎아주는 건 남이 해줘야 하는 거랬어."


우리는 아주머니가 하도 거침없이 수박 덩굴을 잘라버리셔서 말리지도 못하겠고, 그 와중에 열개도 넘는 수박 열매가 사라져서 충격을 받고 있었는데, 정작 아저씨 눈에는 아주머니가 하시는 것도 못마땅했나 보다. 아저씨 말대로라면 수박이 하나밖에 안 남았을 텐데, 아주머니가 불쌍하다며 놔둔 덕에 그나마 컸던 수박 세 개가 남았다.


다음 주에 가니, 수박이 눈에 띄게 커져 있었다. 얼마 뒤에 우리는 어른 주먹만한 수박을 수확할 수 있었고, 온 가족이 한 입씩 맛볼 수 있었다. 우리 부부가 하던 대로 열매 맺힌 수박을 모두 그대로 두었다면, 아저씨 말씀대로 수박은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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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 이후로 '솎아내는' 작업을 좀 더 거침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닥다닥 난 당근이라던가, 무성하게 자라나는 방울토마토 줄기라던가. 일정 간격을 두고, 일정 기준을 두고 솎아내곤 하는데, 우리 밭을 본 분들은 여전히 한 마디씩 하신다.

"그거 더 솎아야 해. 딱 가운데 줄기만 남겨."

아무래도 내 정성이 들어간 내 텃밭이다 보니, 이미 열매가 달리기 시작한, 이미 싹을 틔운 아이들을 가차 없이 내칠 수가 없다. '이만큼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라는 마음이 녹아있어서 그런가.




집에서 아이 수학 문제집 푸는 걸 봐주던 날이었다. 영 계산이 느리고 틀리길래, 왕년에 수학 과외하던 실력을 살려 아이에게 가르쳐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나야, 머리로 암산하는 것보다 수식을 쓰는 게 좋겠어."

"풀 수 있잖아. 풀고 있잖아. 수식을 왜 써야 해?"

"속도도 느리고 봐 봐 이것 또 틀렸잖아. 다시 또 풀어야 하잖아. 한 번에 맞추는 게 낫지."

"아 수식 쓰는 거 싫다고. 그리고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겠어."

"이렇게 줄 맞춰서 받아 올림 쓰고 하는 거야. "

"... 이렇게? 아 몰라. 이문제는 쉬워서 그냥 할 수 있는데 꼭 써가면서 해야 해?"

" 지금이야 간단하니까 그렇지만, 문제가 복잡해지면 수식을 써야만 하잖니. 간단한 문제부터 연습을 해야 복잡한 문제 풀 때 할 수 있지."

" 아아 싫어, 하기 싫다고"


같은 말을 수십 번 반복했나보다. 실랑이 끝에 우리 아이와 나는 둘 다 마음이 상해버렸다. 나름 과외도 많이 했고, 교사 자격증도 있는 사람인데, 왠지 내 새끼를 가르치는 건 아이들 삼십 명 앞에두고 수업하는 것보다 어렵다. 수박에 대해 조언하던 그 아저씨의 말이 생각난다.


내 밭은 남이 솎아줘야 한다.

애정 어린 대상이 엮이면, 아무리 일을 잘해도, 매뉴얼도 알아도, 일을 잘 해내기 어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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