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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선씨 Aug 23. 2020

오롯이 홀로, 2박 3일

연휴라는 말을 싫어한다. 누군가에게는 '休'日 이겠지만, 엄마이자 며느리이자 주부인 나는 삼시 세 끼를 부담해야 하니까. 명절 연'휴'를 앞두고 들떠있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몇 주 전부터 즐겁기는커녕 신경만 곤두서곤 했다. 도무지 쉴 틈이 없는데 누구 맘대로 '휴'일이라고 칭하는 건지. 


휴가를 가도, 가족들과 함께면 오롯이 쉴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짐도 싸야 하고, 애들 챙기면서 삼시세끼 챙겨야 하는 건 매한가지니, 꽤나 품이 든다. 집에 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자발적으로 가는 거니까 놀러 가곤 하지만 역시 '쉴 휴(休)'랑은 거리가 멀게 마련이고, 그래서인지 휴가 말미엔 늘 입안이 헐곤 한다. 후, 어째서 이런 게 '휴가'라는 걸까...




얼마 전에, 정말로 진짜로 제대로 2박 3일을 온전히 나 혼자 있는 '휴가'를 얻었다. 전말은 이러하다. 원래 친구네 가족과 2박 3일 어디 가려고 했는데, 친구가 쭈뼛쭈뼛하더니 그때가 자기 생일이고, 생일날마저 밥순이 노릇은 솔직히 하고 싶지 않다는 거다. 얘기를 듣는 순간 친구 생일을 미처 몰랐던 게 미안해지면서, '아빠 어디 가'를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 맞네. 네 생일이 그때였지... 그렇다면, '아빠 어디 가' 하는 거 어때.
엄마들은 쉬고, 아빠들만 애들을 다 데리고 가평에 가는 거야.


온 가족이 가거나, 가지 않거나 두 가지의 옵션 중에서 고민했던 친구는 신세계를 발견한 듯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고, 그런 친구를 본 친구네 남편은 당황하며 마지못해 답했다.   

"나는 괜찮아. 형님(우리 신랑)만 괜찮으시면."

오! 이제 남은 건 우리 신랑. 신랑도 친구가 '생일'이라는 말을 듣고는 기쁘게(?) 수락했다. 나는 생일인 친구 덕에, 2박 3일의 자유시간을 얻은 셈. 이렇게 2박 3일의 진정한 '휴가'가 시작되었다. 


결혼하고 엄마가 되고 나서 이렇게 긴 시간 혼자 있는 건 처음이다. 친구도 나도, 아빠와 아이들만의 여행에서 먹을 각종 레토르트 식품을 서포트하는 한편, 그 시간 동안 뭘 할까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친구는 마사지도 받고 시술도 하고 미드도 보고 부모님과 식사도 하겠단다. 정작 나는 딱히 뭔가 하고픈 게 없다. 반나절 휴가만 있어도 이런저런 것 하겠다는 시간 계획 하에 바쁘게 움직이던 나인데, 이번엔 이상하리만치 아무런 목표도 잡고 싶지 않다. 그래, 그저 나무늘보처럼 마냥 쉬어야겠다. 그저 가만히 자고 쉬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밥 해 먹는 것도 귀찮으니까 다이어트 겸 2박 3일 단식을 해볼까 싶기도 하다. 




대망의 그 날이 왔다. 아이들과 신랑 짐도 진즉 다 싸놨는데, 이것 저것 챙기고 확인하느라 출발 시간이 자꾸 지체된다. 어서들 나가야 혼자만의 시간이 되는데... 엊저녁에 엄마 없이 두 밤을 자야 한다는 걸 알게 된 막내가 안 가겠다고 울어대서 잘 설득해서 보내야 하는 것도 마지막 남은 과제다. 오전 11시, 아이스크림을 사준다는 말에 극적으로 마음을 돌린 막내와 다른 가족들이 차를 따고 떠났다. 


집이 조용하다. 내가 내는 소리만 들리고, 모든 물건이 가만히 있다. 영 낯설다. 늘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집이 어지럽혀져 있고, 조용할 틈이 없는 우리 집이었는데... 공기가 달라진 느낌이다. 쾌적한 2박 3일을 위해서, 집 정리를 하려 한다. 가만 보니, 그간 언젠가 하겠다며 쌓아둔 묵은 일들이 많다. 화장실 물때 청소, 베란다 곰팡이 청소, 부엌에 늘어져있는 주방도구 정리, 영 시원찮은 배수구 뚫기, 일주일치 분리수거 등. 열심히 할 생각은 아녔는데 눈앞에 보이니 갈등이 된다. 아무도 없는 지금 해야 수월하게 할 수 있긴 하니까. 


마음 가는 대로 하기로 했다. 무려 2박 3일이니까. 유튜브 틀어놓고 보다가, 쓰레기 분리수거하다가, 배달음식 주문해서 먹다가, 화장실 청소했다가. 넷플릭스 보다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꼬물꼬물 움직였다가 누웠다가 TV 보다가 하는데도, 집안 정리를 꽤나 했다. 밤에 라디오 틀어놓고 새벽까지 듣기도 하고, 12시간 넘게 침대에 붙어서 늦잠도 자고 뒹굴뒹굴도 했다. 영화도 5편 넘게 봤고, 무려 100시간 동안 연속 스트리밍 해주는 맛있는 녀석들 다시 보기도 꽤 많이 봤다.


해야 할 일 목록과 실제로 한 것


참 좋은 세상이다. 먹을 건 배달 주문하면 집까지 갖다 주고, 넷플릭스나 유튜브로 볼 것도 많고, 적당히 에어컨 틀어놓고 뒹굴거리면 이렇게 쾌적할 수가 없다. 그동안 너무 궁상맞게 살았나 싶기도 하고, 여기가 뛰쳐나가고 싶던 우리 집이 맞나 싶기도 하다. 그렇게 쉬엄쉬엄 보냈는데도 2박 3일 동안 제법 집 정리를 많이 했다. 혼자서는 이렇게 쉬운 일이 그동안엔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가족들과 함께 사느라 해야 하는 일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것도 새삼 깨닫는다.  




시간은 흐르고, 2박 3일은 지나갔고, 오늘은 여느 주말과 다름없는 일요일 밤이다. 나는 이번 주말 2박 3일 동안 6번의 밥을 차리고 치웠고, 틈틈이 놀아달라는 막내에게 최선을 다해 호응했다. 첫째 둘째는 애아빠와 밀린 문제집을 풀고 잔소리에 시달리며 수시로 집 정리에 동원되었다. 어젯밤 나는 하루 종일 쉴 틈 없이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은 나머지 귀청이 떨어질 것 같아 양쪽 귀를 틀어막고 강제로 10여분 자체 휴식(?)을 취했으며, 오늘은 얼마나 피곤했는지 아이들이 옆에서 떠드는데도 낮잠에 곯아떨어졌다. (평소 잠자리에 예민한 편이다.)


그러니까 이건, 힘든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서, 또는 현재를 버티기 위하여, 지난 꿀 같던 2박 3일을 복기하려고 쓰는 글이다. 언젠가 또 그런 날이 오겠지 하고. 그때가 되면 시끌벅적했던 지금이 그립겠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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