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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Sep 29. 2016

생각이 나서

황경신

단편 소설을 처음으로 접했던 필립 k. 딕의 장편 소설들 위주로 책 읽기를 하고 있는 요즘,
이런 짧은 호흡을 가진 책은, 텍스트를 '읽음' 과 거기서 파생되는 '생각' 에 일종의 환기를 가져온다.

페이스북 언저리에서 지나가듯 보게 됐지만 내 마음을 움켜잡았던 이 책의 한 소절,

『지구에서 조금만 떨어져 보아도 안다.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평생을 걸어도 이르지 못할 위대한 땅과 바닥을 볼 수 없는 거룩한 바다와
머리 위의 아득한 하늘이 얼마나 자비롭게 우리를 감싸 안고 있는지.
헤아릴 수도 없고 짐작할 수도 없는 은혜 속에서 나는 얼마나 자만하고 있는지.
우리가 지어야 할 것은 쓰레기가 아니라 사랑인데,
가장 사랑하는 한 사람조차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 채, 하루를 욕망으로 연명한다.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얼마나 지독한 배신인가.
하나의 씨앗에 대한, 얼마나 끔찍한 모욕인가.』

21세기, 범 스마트한 시대를 맞이하야 검색능력에 특출한 면을 보이는 나로썬
저 한 단락만으로 이 책을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저 글 그 덕에 황경신이라는 작가를 알게됐고,
그녀가 내가 소싯적에 즐겨보던 '페이퍼(paper)' 의 편집장이란 사실도 이제야 알게됐다(그리고 꾸준히 글을 쓰고 책을 낸다는 사실도).

온갖 되도 않는 글들과 쓸데없는 사진들로
인기를 등에 업고 에세이집을 개나 소나 펴 내는 요즘같은 시대에
오롯이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글을 써 내는 그녀에게 단박에 사로잡혔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들도 있어서, 멍-한채 읽던 단락도 꽤 되지만)
책 속에 인용문들도 더러 있어서, 덕분에 찾아 읽어야 할 책들도 생겼다('베아테 라코타 글, 발터 셸스 사진 『마지막 사진 한 장』').

그녀의 글을 읽고 있으면 정말이지 '글 참 맛깔나게 잘 쓴다' 라는 생각이 든다.
'좋은 글' 혹은 '좋은 책' 이라는 기준은,
자기 자신의 생각과 소신에 어느정도 부합하는 면을 자주 마주하게 되면 그런 책과 글이 된다는 점에서
정말이지 마음에 드는 책이고 작가이다(특히 'tv 에 절대 나가지 않겠다' 던 소신이, 요즘 사람 같지 않다고 느꼈다).

그녀의 신간과 옛 책들도 필립 k. 딕을 탐독하는 중간중간에 간간히 읽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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