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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Sep 29. 2016

작년을 기다리며

필립 k. 딕

폴라북스에서 연이어 발간한 필립 k. 딕의 장편소설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소설이다.
그 유명한, '안드로이드는 전기양(羊) 의 꿈을 꾸는가?' 를 가볍게 제치고서 말이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의 가장 독특한 면모는 뭐니뭐니해도
인간보다 더욱 인간답게 그려진 '인조인간' 의 모습에 있었다.

하지만 한발 더 깊게 소설 속으로 들어가보면,
꿈과 현실, 그리고 환상과 비현실 사이를 오가며 인간 자체의 정체성을 물어보던 주제의식이
소설의 sf적 감상의 재미를 실로 반감시키는 요소로 작용하니,
제목처럼 저런 '이미지' 만 남게된 소설이 됐다.
(알쏭달쏭한 소설만큼 어려웠던 영화는 더욱 그러했고)

필립 k. 딕 작품들 중에 가장 '수작' 으로 꼽히는, 
'발리스 3부작(발리스-성스러운 침입-티모시 아처의 환생)' 은 글을 잘 풀어나가다가도 가끔씩,
제정신이 아니었던 작가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듯한 생경한 장면들이 뜬금없이 등장하기 때문에 소설에의 몰입이 그다지 쉽지는 않다.

그렇지만 본 작품은 sf소설에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시간여행' 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전혀 뻔하지 않고 전혀 어렵지 않게 그려냈다.
범 우주적인 시대적 배경과, 지구와 지구인들의 생사를 좌지우지하는 기로에서
평행우주를 여행하며 끊임없이 고뇌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시간여행을 소재로 하는 무수한 sf소설들 중에 단연 독특하고 가장 앞서있다는 생각이다.

소설을 읽어내려가는 내내 연신 흥미진진했고,
감정이입이 되어 한동안 주인공인 '에릭' 과 그 주변인물들을
실제 헐리우드 배우들과 매치시켜가며 즐겁게 탐독했다(누가 뭐래도 '몰리나리' 역할은 단연 '존 굿맨' 이다)
sf가 지닌 장르적 특성 덕분에,
책을 읽다보면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여러 배우들의 모습과 겹쳐지게 되어 다른 소설들보다 몰입이 더욱 쉽다.
몇권 남지 않은 필립 k. 딕의 남은 장편소설들도 이 소설만큼만 재미있길 기대한다.












『"또 뭔가?" 몰리나리는 고함을 질렀다. "그놈의 시간여행 약을 먹고 머리가 이상해지기라도 한 건가? 그래서, 자네 앞에서 작고 하찮은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어? 옆이나 뒤가 아니라? 혹시 작년이 다시 되돌아와주기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거야?"
에릭은 손을 뻗어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작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시 와줄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군요."』













소설의 제목(now wait for last year) 이 된 에릭이 기다리던 '작년' 은, 에릭이 스스로의 자멸적 성향과 고통스러운 결혼 생활로 피폐해지기 전의 일상성을 상징한다. 다중화하고 붕괴하는 '미래' 앞에서 고뇌하는 에릭에게 개변 불가능한 과거란, 단순한 노스텔지어나 퇴행을 넘어선, 일종의 심리적인 '준거점' 으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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