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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Oct 02. 2016

댄스 댄스 댄스 상/하

무라카미 하루키

내가 왜 이 책을 먼저 읽었을까.

본작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데뷔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부터 시작해,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까지 총 4부작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결말을 담은 책이다.

하지만 친절한(?) 작가답게 앞의 소설들을 전혀 읽지 않은 나같은 사람에겐 온전히 독립적인 이야기로 읽혀도 무방하고,
극 내내 앞의 이야기들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까지 해 준다.

그래도 앞의 이야기들이 궁금한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작품에 간간히 등장하는 '양 사나이' 의 '시작' 은 무엇인지(본작엔 양 사나이의 '끝' 이 담겨있다), 왜 그와 주인공이 연결되어 있는지, 키키와의 첫 만남은 어떠했는지, 땅에 묻어버린 '정어리' 와 주인공 '나' 의 친구 '네즈미' 의 이야기는 또 어땠는지..
궁금증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1970년을 원점으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 '1973년의 핀볼' - '양을 쫓는 모험' 까지 이 초기 3부작으로 작가 자신의 '전공투운동' 을 청산하려 한다.

전공투운동이란, 1960년대 일본의 정국을 무질서와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학생 운동이라고 한다.

주로 반미-반체제-반전 등의 구호를 내걸고 화염병 데모 사태에서 무장 투쟁까지 전개했던 학생 운동의 일환이었다고 하는데 그중 일부는 외국에 나가 무장 투쟁을 하며 이스라엘의 수도 텔아비브 공항에서 기관총을 난사하여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살상하기도 하고 여객기를 납치하여 북한으로 간 주인공 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 운동들은 1970년대 초에 이르러 자취를 감추게 되는데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 학생운동의 소멸과 함께 자신도 '관념의 세계=혁명' 의 '환상' 으로 부터 깨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초기의 3부작 소설들은 급작스럽게 상실되어진 관념과 이념에서 오는 체념과 허무주의가 팽배했다고 한다(이 쯤 되면 진심으로 읽고싶어진다).


관념의 세계에서 '현실' 로 돌아오는 길을 만들어가는 본작은 여전히 허무주의와 상실감에 하루하루 살아가는 서른 넷의 이혼남 주인공인 '나' 가,
이전에 '돌고래 호텔' 에서 처음 만난 '양 사나이' 를 건물 이름과 인테리어만 바뀐 '돌핀 호텔' 에서 다시 조우하며 '재생' 의 길로 들어서는 이야기를 담고있다.

아마도 이전에 주인공에게 적지 않은 조언자 역할을 했던 모양인지 양사나이는 극 초반부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찾으며 살아가야 할지 방향을 못잡는 '나' 에게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저 춤추며 돌아가라고 전한다(그래서 소설 제목이 '댄스 댄스 댄스'...).


소설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소설엔 일단 무수한 올드팝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름도 열거하기 힘들만큼 굉장히 많은 곡들이 소설 내내 플레이 되는데, 제목에서 주는 뉘앙스 덕분에 댄스 교습소에 다니는 이야기인냥 쉬이 상상이 되듯, 주인공이 각각의 bgm 에 맞춰 춤 따위를 추는게 아니고,
세상이 흘러가는 흐름(flow) 에 맞춰 스텝을 제대로 밟아가(려고 애쓰는) 는 이야기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퍽 재미있다.

한 때는 탐정 이야기처럼, 또 한 때는 지리멸렬한 과거의 기억과 유령같은 추억들에 사로잡혀 회한에 잠기기도 하고
새롭게 만나는 인연들과 또 새롭게 이별하는 등장인물들과 주인공이 빚어내는
일종의 '콜라보' 가 여러 댄스 장르를 혼합해 놓은 듯, 각각의 파트너들이 모두 매력적인 인물들로 가득 차 있는게 이 소설의 특징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대게 의욕이 별로 없고 마치 신이 개입이라도 해주길 바라며 멍하니 지내는 나날들을 많이 보낸다.
이 소설을 보면서 무던히도 '현실', '타인', '또 다른 세계' 에 '이어지려' 애쓰는 주인공이 어쩔땐 답답하기도, 또 어쩔땐 나 같기도 해서 거의 흡수되다시피 읽었던 소설이다.

여전히 무라카미의 소설들 중 꽤 명징하고 이정도면 '밝은' 축에 속하는 엔딩이 퍽 마음에 들어서
이전에 읽었던 그의 소설들 중에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1q84',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 에 이어 4등의 자리를 꿰찬 소설이 되었다.

솔직히 '쥐 3부작' 이던 초기의 작품들의 방식에서 완전히 탈피해, 새로운 시도를 했다고 전해지는, 지극히 판타지스럽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보다는 이런류의 소설이 훨씬 흡입력이 있다.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의 중간지점이 등장한다는 점이나 그곳에 쉬이 넘어가거나 그곳이 꿈에서 발현된다는 이점이 있으니
이해도 쉽고 공간이나 배경을 상상하는것도 쉽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는 어딘가 좀 답답한 막이 씌워져있는 소설 같달까. 명쾌하게 확 와닿지는 않는 소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있어서 '섹스' 란 연애의 연장선에 있는게 아닌, '도구' 나 '행위' 에 그친 어떠한 '장치' 로써 소설에 등장할 때가 많은데,
이 소설을 단 한 문장으로 압축해서 이야기 해 보자면,
'처음 만난 여자와 예전엔 못잤는데 돌고 돌아 다시 만나 결국엔 자는' 이야기이다.

본작에서 '섹스' 는 주인공 '나' 를 현실과 이어지게 해 주는 아주 커다란 매개체로 작용한다.
그래서 엔딩 부분의 씬이 조금 특별하게 여겨지는데, 거의 여자나 느낄법한 섹스에 대한 '애틋함' 을 열거해 놓았다(남자는 주로 한 번 사정해 버리면 끝나는 이미지니까).


어쨌든 확실하게 끝을 내서 좋다.
지지부진하게 혼자 현실에 맞닿으려, 본인이 처한 현실의 무게를 지탱하는 부분들도 좋았고,
하루키 소설에 꼭 나오는 아주 어리고 예쁜 아이를 감상하는 부분도 좋았고,
주인공인 '나' 가 내 상황이나 나이대-성향 따위가 엇비슷해서 좋았고(결혼도 이혼도 나는 하진 않았지만 ㅎ),

무엇보다 머지않아 읽게 될 '쥐 3부작(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3년의 핀볼-양을 쫓는 모험)' 에 등장할 양사나이와 키키, 네즈미의 이야기가 기대가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처음 읽었던 '상실의 시대' 때 부터 거의 출간한 순서의 반대로 읽게 되어, '1q84' 를 읽은 뒤에 '태엽감는 새' 를 읽게 되었는데, 시간상 첫 등장이었던 우시카와의 모습이 어찌나 반갑던지)





+
이런 종류의 책을 읽으면 나는 나 자신에게 주인공과 똑같이 묻곤 한다.
'나는 어.딘.가.에 이.어.져 있는가?'
'나는 제대로 스.텝.을 밟아가며 춤을 추고 있는가?'


문득 양 사나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춤을 추는 거야. 음악이 계속 되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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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에는 두개의 문이 달려 있는데 하나는 입구이고 하나는 출구다. 서로 바뀔수는 없다. 입구로는 나갈 수 없고, 출구로는 들어올 수 없다. 그러나 어쨌든 모두 나간다. 어느 누구는 새로운 가능성을 시도하기 위해 나갔으며, 어느 누구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나갔다. 어느 누구는 죽었다. 남은 인간은 한 사람도 없다. 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부재를 항상 인식하고 있다. 사라져간 사람들을. 그들이 입에 담은 말들이랑, 그들의 숨소리랑, 그들이 읊조린 노래가 방의 이 구적 저 구석에 먼지처럼 떠돌고 있는게 보인다.



언제까지 이런 일이 계속될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제 서른네 살이다. 언제까지 이런 일이 계속될 것인가?
나는 서글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나의 책임이다. 그녀가 내 곁을 떠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렇게 될 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도 알고 있었고,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조그마한 기적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하찮은 무언가를 계기로 근본적인 전환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그런 것을. 그러나 물론 그런 일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가버렸다. 그녀가 없어서 나는 쓸쓸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은 전에도 경험한 적이 있는 쓸쓸함이었다. 그리고 나 자신이 그 쓸쓸함을 제법 잘 견디어 낼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익.숙.해.져. 가.는. 것.이.다.



새벽녘에 나는 혼자서 멍하니 달을 바라보면서, 이런 일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나는 곧 또 어디선가 다른 여자와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유성처럼 자연스레 이끌리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헛되이 기적을 기대하며, 시간을 갉아먹으며, 마음을 마멸시키며, 헤어져 가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그래서 나는 낭비라는 건, 고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최대의 미덕이라고 그에게 가르쳐주었다.




확실히 그렇다. 여기엔 이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여기엔 내가 찾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눈 치우기" 라고 그녀는 말했다.
"문화적 눈 치우기" 라고 나는 말했다.




그것은 두려울 정도의 완벽한 어둠이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은 나를 필요로 하고 있어. 당신은 혼란스러워하고 있으니까. 당신은 자기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지 못해. 당신은 볼 것을 못 보고, 남에게 보이지도 않거든. 어딘가 가려고 해도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해. 당신은 여러 가지를 잃어버렸어. 여러 가지 연결의 매듭을 풀어 놓고 말았지. 하지만 그것을 대신할 것을 못 찾고 있어. 그래서 당신은 혼란스러워하고 있단 말이야, 자기가 아무것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져서. 그리고 실제로 아무것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지. 당신이 연결되어 있는 장소는 여기뿐이야."




"춤을 추는 거야" 라고 양사나이는 말했다. "음악이 울리는 동안은 어쨌든 계속 춤을 추는 거야. 내가 하는 말 알아듣겠어? 춤.을. 추.는. 거.야. 계.속. 춤.을. 추.는. 거.야."




춤을 추는 거야. 음악이 계속 되는 한.




나는 침대 속에 들어가 등받이에 기대어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주름 하나 없는 하얀 블라우스. 감색의 타이트한 스커트. 스타킹에 감싸인 날씬한 다리. 그녀도 역시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탓으로 그녀는 마치 낡은 사진 속의 모습 같아 보였다. 그런 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건 멋진 일이었다. 자신이 무엇인가에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발기마저 한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회색 하늘, 죽도록 졸린 오후 3시의 발기.




나는 가사를 기억하고 있는 부분만 따라 불렀다.
"잘 기억하고 있네요" 하고 유키가 감탄한 듯 말했다.
"그야 그렇지. 나도 예전엔 너만큼 열심히 록을 들었으니까" 라고 나는 말했다. "네 나이 때에 말이야. 매일 라디오에 매달려 있고, 용돈을 모아 레코드를 샀지. 로큰롤. 이 세상에 그만큼 멋진 건 없다고 생각했어. 듣고 있기만 해도 행복했지."
"지금은 어때요?"
"지금도 듣고 있지. 좋아하는 곡도 있고. 하지만 가사를 외울 만큼 열심히 듣지는 않아. 예전만큼은 감동하지 않아."
"왜 그래요?"
"왜 그럴까?"
"가르쳐줘요" 라고 유키는 말했다.
"정말 좋은 건 별로 없다는 걸 알게 되니까 그렇겠지" 라고 나는 말했다. "정말 좋은 건 아주 적거든. 무엇이든 그래. 책이나, 영화나, 콘서트나, 정말로 좋은 건 적어. 록 뮤직이란 것도 그렇지. 좋은 건 한 시간 동안 라디오를 들어도 한 곡 정도 밖에 없어. 나머진 대량 생산의 찌꺼기 같은 거야. 하지만 예전엔 그런 거 깊이 생각하지 않았지. 무엇을 듣건 제법 재미있었어. 젊었고,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고, 게다가 사랑을 하고 있었어. 시시한 것에도, 사소한 일에도 마음의 떨림 같은 걸 느낄 수 있었어. 내가 하는 말 알겠어?"




"지금은 사랑을 안해요?" 라고 유키가 물었다.
나는 그 말에 대해 좀 진지하게 생각했다. "어려운 질문인데" 라고 나는 말했다. "유키는 좋아하는 남자가 있나?"
"없어요" 라고 유키는 말했다. "싫은 녀석은 잔뜩 있지만."
"기분은 알겠어" 라고 나는 말했다.
"음악을 듣고 있는 편이 나아요."
"그 기분도 알겠어."
"정말 알아요?" 라고 말하고, 유키는 의아한 듯 눈을 가늘게 하고 나를 보았다.
"정말 알아" 라고 나는 말했다. "다들 그것을 도피라고 불러. 하지만 뭐 그건 그걸로 됐어. 내 인생은 내 것이고 네 인생은 네 것이야. 무엇을 구하느냐만 명백하다면, 너는 너 좋을 대로 살면 되는 거야. 남이 뭐라고 하건 알 게 뭐야. 그런 녀석들은 커다란 악어에게 먹혀 죽으라지. 나는 예전에, 너만 한 나이에 그렇게 생각했었어. 지금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그건 어쩌면 내가 인간적으로 성장해 있지 않기 때문인지도 몰라. 아니, 어쩌면 내가 영원히 옳은 것인지도 몰라. 아직 잘 모르겠어. 쉽게 해답이 나오지 않거든."




"벌써 서른네 살이야. 싫어도 모두 어른이 되지" 라고 나는 말했다.
"확실히 그래. 바로 그렇지. 자네 말대로야. 하지만 인간이란 이상해. 한순간에 나이를 먹는단 말일세. 정말이지, 나는 예전엔 인간이란 건 1년, 1년 순서대로 나이를 먹어가는 거라고 생각했었지."
고탄다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듯 하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 인간은 한순간에 나이를 먹는다고."




내가 부엌에서 커피를 끓이고 있자니까, 나머지 세 사람이 잠에서 깨어 일어났다. 아침 6시 반이었다. 메이는 목욕가운을 입고 있었다. 마미는 고탄다의 베이드리 파자마 윗도리만을 걸치고, 고탄다는 그 아랫도리만을 걸치고 있었다. 나는 블루진에 티셔츠를 입었다. 우리는 넷이서 식탁을 둘러싸고 커피를 마셨다. 빵도 구워 버터랑 마멜레이드와 함께 먹었다. fm에서 <바로크 음악을 그대에게>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헨리 퍼셀. 캠프의 아침 같았다.
"캠프의 아침 같군" 하고 나는 말했다.
"어쩜!" 하고 메이가 말했다.




나는 아주 조금씩이긴 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목적을 가졌으며, 그럼으로써 지극히 자연스럽게 걸음걸이를 터득해 왔던 것이다. 나쁘지 않은 징후였다. 춤춘단 말이다, 하고 나는 느꼈다. 이것저것 생각해도 소용없다. 어쨌든 제대로 스텝을 밟고, 자신의 체계를 유지할 것. 그리고 이 흐름이 나를 어디로 이끌어가는지 주의 깊게 계속 주시할 것. 이.쪽. 세.계.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것.




이따금 그녀가 부러워졌다. 그녀가 지금 열세 살이라는 게 말이다. 그녀의 눈에는 갖가지 일들이 모두 신선하게 비치리라. 음악이며 풍경이며 사람들이. 그것은 내가 보고 있는 사물의 모습과 아주 다를 것이다. 나 역시 옛날에는 그랬다. 내가 열세 살이었을 무렵, 세계는 훨씬 단순했다. 노력은 당연히 보답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고, 말은 보증되어야 하는 것이었고, 아름다움은 그곳에 머물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열세 살 때의 나는 그다지 행복한 소년은 아니었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으며, 혼자 있을 때의 자신을 믿을 수 있었지만, 당연히 대개의 경우 혼자 있지는 못했었다. 가정과 학교라는 두 종류의 완강한 테두리 속에 갇혀서 나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초조한 나이였다. 나는 한 여자애를 사랑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물론 순조롭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랑이 어떤 것이라는 것 조차도 알지 못했으니 말이다. 나는 그 여자애하고 제대로 이야기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내성적이고 재치가 없는 소년이었다. 선생이나 부모가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가치관에 이의를 제기하고 반항하려 했지만, 이의를 제기할 말이 제대로 잘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해도 솜씨 좋게 하지 못했다. 무슨 일을 해도 척척 해내는 고탄다와 완전히 반대 입장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사물의 신선한 모습을 볼 줄은 알았다. 그것은 정말 멋진 일이었다. 냄새가 제대로 풍겼고, 눈물은 진실로 따뜻했으며, 여자애는 꿈처럼 아름다웠으며, 로큰롤은 영원히 로큰롤이었다. 영화관의 어둠은 우아하고 친밀했으며, 여름밤은 끝없이 깊고 관능적이었다. 그러한 초조한 나날을 나는 음악과 영화와 책과 더불어 지냈다.




"버티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라고 나는 말했다. "댄스 스텝 같은 거예요. 습관적인 겁니다. 몸이 기억하고 있어요. 음악이 들리면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여요. 주변이 바뀌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굉장히 까다로운 스텝이어서, 주변 일을 생각하고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너무 여러가지를 생각하면, 스텝이 틀어져 버리니까요. 단지 서투를 뿐이에요. 유행을 따라가지 못해요."




정신을 차려보니 무력감이 조용히 소리도 없이 방 안에 물처럼 차 있었다. 나는 그 무력감을 떨쳐버리려는 듯이 욕실로 가서 <레드 클레이>를 휘파람으로 불면서 샤워를 하고, 부엌에 선 채로 캔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눈을 감고 스페인어로 하나에서 열까지 센 다음, "끝났다" 라고 소리 내어 말하고는 손뼉을 치자 무력감은 바람에 날려가듯 휙 사라져버렸다. 이것이 나의 주술이다. 혼자서 지내는 사람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가지 능력을 익히게 된다. 그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




"난 당신을 이해할 수 없어요" 하고 유미요시가 아주 차분하게 말했다. "이따금 당신 생각을 해요. 하지만 당신이라는 사람의 실체를 잘 알 수 없어요."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겠어" 라고 나는 말했다. "나는 서른넷 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나이에 비해 아직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아. 유보 사항도 너무 많고. 지금 그것을 조금씩 줄여가고 있는 참이야. 나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어. 그러니까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여러 가지를 자세히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그렇게 되면 좋겠군요" 하고 그녀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제3자가 된 듯이 말했다. tv의 뉴스 캐스터 같다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좋겠군요. 네, 그럼 다음 뉴스' 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럼 다음 뉴스......




"아저씨는 요리 솜씨가 좋군요" 하고 유키가 감탄스레 말했다.
"솜씨가 좋은 게 아냐. 단지 애정을 기울여 정성스레 만들었을 뿐이야. 그러기만 해도 상당한 차이가 있어. 자세의 문제야. 여러 가지 사물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사랑할 수 있어. 기분 좋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기분 좋게 살아갈 수 있고 말이야."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는 거군요?"
"그 이상은 운이야" 라고 나는 말했다.




"확실히 나는 그런 일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라고 나는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거절하고 돌려보냈어야 했어. 하지만 그때는 피곤해 있었고,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어. 나는 아주 불완전한 인간이야. 불완전하고, 노상 실패하거든. 하지만 배워. 두 번 다시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결심하지.그래도 똑같은 실수를 두번씩 저지르는 경우가 적지 않아. 왜 그럴까? 간단해. 왜냐하면 내가 어리석고 불완전하기 때문이야. 그런 때에는 역시 약간은 스스로를 혐오하게 돼. 그리고 똑같은 실수를 세 번은 저지르지 않으리라고 결심하지. 그렇게 조금씩 나아지지. 조금씩이지만 그래도 나아지는 건 분명해."




"저기요, 남자는 그렇게도 강렬하게 여자를 품고 싶어지나요?" 하고 어느 날 해변에 누워 있을 때 갑자기 유키가 내게 물었다.
"그래. 그 강도에 개인적인 차이는 있지만, 원리적으로, 육체적으로 남자라는 것은 여자를 품고 싶어 하게 되어 있어. 섹스에 대해서는 대상 알고 있겠지?"
"대충 알고 있어요" 하고 유키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욕이라는 게 있어" 라고 나는 설명했다. "여자하고 자고 싶어 하는 거지. 자연스러운 일이야. 종족 보존을 위해-."
"종족 보존 따위에 대해 묻고 있는 게 아니에요. 생물 시간 강의 같은 소리는 하지 말아요. 그 성.욕.에 대해 묻고 있어요. 그게 어떤 것일가를."
"이를테면 네가 새라고 하자" 라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하늘을 나는 일을 아주 좋아한다고 하자.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자주 날 수가 없어. 날씨나 풍향이나 계절에 따라 날 수 있을 때와 날 수 없을 때가 있거든. 하지만 날 수 없을 날이 계속되면, 힘도 남아 돌고 초조해져. 자신이 부당하게 깎아내려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왜 날 수 없을까 하고 화도 나고 말이야. 이런 느낌을 알 수 있겠어?"
"알 수 있어요" 라고 그녀는 말했다. "언제나 그렇게 느끼고 있어요."
"그럼 얘기는 간단해. 그게 성욕이야."




모든 게 이어져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모든 게 이어져 있다. 그런데 나만이 그 이음매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건 그런 세계야. 미나토 구와 유럽 자동차와 롤렉스를 손에 넣으면 일류로 여겨지지. 쓸모없는 짓이야. 아무런 의미도 없어. 요컨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필요라는 것은 그처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이야. 자연히 생겨나는 게 아니야. 날.조.되.는. 거.야.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데도, 필요한 것이라는 환상을 부여받는 거야. 간단해. 정보를 자꾸 만들어가면 돼. 주거지라면 미나토 구입니다. 승용차라면 bmw입니다. 시계는 롤렉스입니다. 하는 식으로 말이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정보를 부여하는 거야. 그러면 모두들 전적으로 믿어버려요. 주거지라면 미나토 구, 승용차는 bmw, 시계는 롤렉스라고 말이야. 어떤 종류의 인간은, 그런 것을 손에 넣음으로써 진짜 차별화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여.느.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렇게 하면 결.국. 모.든. 사.람.들.과. 똑.같.아.지.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하는 거야. 상상력이 부족해. 그 따위 것들은 인위적인 정보에 지나지 않아. 단순한 환상이야."




"사랑" 하고 그는 말했다. "내게 필요한 건 그거야."




"그래요. 그 여자는 메이라고 해요. 이름을 알아냈어요. 물론 본명은 아니겠지만. 겐지 메이예요. 역시 매춘부였어요. 내 육감대로. 일반 가정의 보통 여자는 아니었어요. 얼핏 보기에는 분명히 보통 여자인데, 사실은 보통 여자가 아니었어요. 요즘은 분간하기가 어려워요. 예전에는 좋았어요. 한눈에 매춘부인지 아닌지를 금방 알 수 있었죠. 입고 있는 옷이나 화장이나 표정 따위를 보고 말이에요. 요즘엔 안 돼요. 도저히 그런 일을 할 것 같지 않은 아가씨가 매춘을 하거든요. 돈을 벌기 위해서라든지 호기심 때문에 말이에요. 해서는 안 될 일이죠. 그리고 위험해요. 안 그래요? 늘 모르는 남자와 만나 밀실에 틀어박히는 거예요.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인간들이 있어요. 변태도 있고 정신이상자도 있어요. 위험해요. 그렇게 생각지 않아요?"




"유감스럽지만 분명히 움직이고 있지. 시간은 자꾸 지나가지. 과거가 불어나고 미래가 적어져 가거든. 가능성이 줄어들고, 회한이 늘어나는 거야."




"그가 그 여자를 죽였어요."




나는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전화국에 근무하고 있던 여자 친구를 생각해냈다. "달나라로 돌아가요, 당신" 하고 그녀는 내게 말했었다. 그래, 네 말이 옳아,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확실히 달나라로 돌아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이곳의 공기가 내게는 너무 진하다. 이곳의 중력이 내게는 너무 무겁다.




나는 침대 위에서 세계를 증오했다. 마음속으로부터 격렬히, 근원적으로 세계를 증오했다. 세계는 뒷맛이 개운치 않은 부조리한 죽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무력하고, 삶의 오물을 잔뜩 뒤집어 쓰고 있었다. 사람들은 입구로 들어와, 출구로 나갔다. 나간 사람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나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내 손바닥에는 역시 죽음의 냄새가 배어들어 있었다. 아.무.리. 씻.어.도. 그.건. 지.워.지.지. 않.아.




"정말로 나를 미워하지 않아요?"
"물론" 하고 나는 말했다. "미워하지 않아. 그럴 리가 없어. 이 불확실한 세계에서 그것만은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어."
"절대로?"
"절대로. 2500퍼센트 미워할 리 없어."
그녀는 미소 지었다. "그 말을 듣고 싶었어요."




나를 더 이상 외톨이로 만들지 말아다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내게는 당신이 필요해. 나는 외톨이가 되고 싶지 않다고. 당신이 없으면 나는 원심력에 의해 우주 가장자리로 날아가 버릴 듯한 느낌이 들어. 제발 내게 얼굴을 보여서 나를 어딘가에 연결시켜 다오. 현실의 세계에 연결시켜 달라고. 나는 귀신에 홀리고 싶지 않아. 나는 서른네 살 된 보통의 남자야. 내.게.는. 당.신.이. 필.요.하.단. 말.이.야.




이 장소가 나의 이음매이다. 괜찮아, 여기는 나를 위한 장소다, 하고 나는 스스로 자신을 타일렀다.




"한 바퀴 돌아 어디로 돌아왔어요?"
"현.실.로." 라고 나는 말했다. "꽤 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현실로 돌아왔어. 여러 가지 기묘한 것들 속을 통과해 왔어. 여러 사람들이 죽었어. 여러 가지가 상실되었어. 굉장히 혼란해져 있었는데, 그 혼란이 완전히 해소된 건 아냐. 아마 혼란은 혼란스러운 대로 존속되리라고 생각해. 하지만 나는 느껴. 나는 이로써 한 바퀴 돌았다는 걸. 그리고 여기는 현실이야. 하지만 어떻게든 계속 춤을 추었지. 제대로 스텝을 밟았어. 그래서 이리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거야."
그녀는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체적인 건 지금 도처히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아. 하지만 나를 믿어주었으면 좋겠어. 나는 당신을 원하고 있고, 그건 내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야. 그리고 당신한테도 중요한 일이야. 거짓말이 아니야."
"그럼 나는 어떡하면 좋죠?" 하고 그녀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말했다. "감동해서 당신과 자면 돼요? 멋있어, 그토록 나를 원하고 있었다니 최고야! 하면서요?"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 구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다른 세계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그녀는 천천히 옷을 벗어갔다. 옷 스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계속되어 있었다. 그녀는 옷 하나를 벗으면, 그것을 깔끔하게 개어 어딘가에 두고 있는 듯 했다. 안경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소리도 들렸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아주 섹시한 소리였다.




현.실.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여.기.에. 눌.러.앉.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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