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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Mar 15. 2017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 무라카미 하루키

드디어 무라카미 하루키의 데뷔작을 읽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재미있는 지점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직접 쓴 '작가의 말' 이 소설보다 재미있다는 것이다.





드디어 무라카미 하루키의 데뷔작을 읽었다.


아마 10년도 더 전에 군에 입대한지 정확히 1년을 딱. 찍었을 무렵, 할게 너무 없어서 소일거리로(!) 휴게실 책장에 꽂혀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 숲)' 를 읽은게 나의 독서 생활의 시작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동안 읽은 책의 수를 세어보니(독후감을 웹에다 쓰면 이런 이점이 있지) 이 책이 정확히 100권째 되는 책이라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래저래 나에게 특별한 작가구나 싶었다.


책의 타이틀은 '자전적 이야기' 라고 쓰여져 있지만 하루키가 재즈 바를 운영하던 당시에 부엌 테이블에서 맥주와 함께 쓴 작품이다. 





소설을 쓴 이유는 하루키가 스물아홉살, 진구 구장의 맨흙더미 외야석에 누워있다가 문득,

'재능이나 능력이 있든 없든, 아무튼 나 자신을 위해 무언가 써보고 싶다' 고 생각이 들어서 싸구려 만년필과 원고지를 테이블에 나란히 놓고 쓰기 시작했단다.


소설은 완벽한 허구의 인물이지만 생명력을 불어넣는 디테일을 잊지 않은 '데릭 하트필드' 라는 미국 작가를 등장시킴으로써 실재와 허구를 혼동하게 만들며, 그럴듯하게 쓰인 책이다. 데뷔작이기 때문에 상실의 시대 이후부터 하루키의 소설들 위주로 정주행 해 오다가 읽을게 없어, 역순으로 그의 작품들을 읽어나가며 '댄스 댄스 댄스' 까지 손을 댔는데, 그 작품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기 4부작' 중 맨 마지막 편이라길래 읽고나서 일부러 이 책을 집어들었다.

(하루키의 '초기 4부작' 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 '1973년의 핀볼' - '양을 쫓는 모험' - '댄스 댄스 댄스')



본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는 마치 하루키 작품 세계가 '상실의 시대'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것 마냥, 전해져오는 '필력' 이랄까 문체 자체가 후기의 작품들과는 상당히 차이가 난다.

내게는 '상실의 시대' 를 기점으로 그 전에 쓰인 소설은 이 작품이 처음이지만 확실히 다르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정말이지 알 도리가 없달까. 아주 짧은 작품이라서 여러 단락들과 상황들이 층을 이루는 구조로도 보이는데, 간결하고 짧은 문장들과 어휘 덕분에 흡입력은 말할 필요도 없이 전체적으로 경쾌함이 있다.


또한 하루키 특유의 '청춘' 에 대한 공허함과 결핍감이 은근하게 베어있어, 그런 것들을 보다 더 심층적으로 쌓아올린 후기의 작품들과는 또 다른, '가벼운 맛' 을 전해주는 작품이다.


어찌됐든 다음은 '1973년의 핀볼' 이다.







+

이 책을 읽으면서 맨 뒤에 있는 작가의 말이나 엮은이의 말, 해설에 반복되서 나오는 '처녀작' 이라는 말이 참 불편했는데(횽아들, 이거 나만 불편해?)

국내에서 데뷔작을 처녀작이라고 명시한게 대체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기본적으로 인류의 역사에 '여성' 을 심하게 내리 깔고 보는 문화가 dna에 심어져 있었나보다(특히 한국인들은).

처녀작 말고 총각작은 안되는지?

'처녀' 라는 어감에 대한 고민이었다면 '숫총각작' 은 어때?


앞으론 처녀작보다는 '데뷔작' 이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쓰이길 바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발표 순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9) O

1973년의 핀볼(1980) X

양을 쫓는 모험(1982) X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985) O

상실의 시대(1987) O

댄스 댄스 댄스(1988) O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1992) X

태엽 감는 새(1994~1995) O

스푸트니크의 연인(1999) X

해변의 카프카(2002) O

어둠의 저편(2004) X

1q84(2009) O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2013) O

기사단장 살인(2017) X


그러고보니 하루키의 책을 다 읽고도 미처 리뷰하지 못한게 너무 많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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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계기는 실로 간단하다.

갑자기 무언가가 쓰고 싶어졌다. 그 뿐이다.

정말 불현듯 쓰고 싶어졌다.










"완벽한 문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약 당신이 진정한 예술이나 문학을 원한다면 그리스 사람이 쓴 책을 읽으면 된다. 참다운 예술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노예 제도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노예가 밭을 갈고 식사를 준비하고 배를 젓는 동안, 시민은 지중해의 태양 아래서 시작時作에 전념하고 수학과 씨름했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다.








"왜 그렇게 책만 읽는 거야?"

"플로베르가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이지."

"그럼 살아 있는 작가의 책은 읽지 않는다는 말이야?"

"살아 있는 작가는 아무 가치도 없으니까."

"어째서?"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걸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거든."








쥐의 소설에는 뛰어난 점이 두 가지 있다. 우선 섹스 장면이 없다는 것과 한 사람도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은 가만 내버려둬도 죽기도 하고 여자와 자기도 한다. 그런 법이다.








남의 집에서 잠이 깨면 언제나 다른 육체에 다른 영혼을 우격다짐으로 구겨 넣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왜 여기서 잤어?"

"?"

"왜 나를 데려다주고 즉시 사라지지 않은 거냐고?"

"내 친구 중에 급성 알코올중독으로 죽은 녀석이 있어. 위스키를 잔뜩 퍼마신 뒤에 멀쩡하게 작별 인사까지 하고 헤어져서 집으로 씩씩하게 걸어갔지. 그러고 나서 이를 닦고 파자마로 갈아 입고 잤는데 다음 날 아침에는 죽어 있었아. 아주 멋진 장례식이었지."

"...그래서 나를 밤새껏 간호했다는 얘기야?"

"사실은 네 시쯤에 돌아갈 생각이었어. 그런데 그만 잠이 들어 버린 거야. 아까 일어났을 때도 돌아갈까 생각은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지."

"왜?"

"최소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너에게 설명은 해줘야 할 것 같아서."

"굉장히 친절하시군."







"틀림없이 훌륭한 집안일 거야."

"그럼, 훌륭한 데다가 돈도 없으니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날 지경이라고."

그녀는 빨대 끝으로 진저에일을 계속 휘저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집이 훨씬 가난해."

"어떻게 알지?"

"냄새로 알아. 부자가 부자 냄새를 맡을 수 있듯이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의 냄새를 맡을 수 있거든."







"어머니는?"

"어딘가에 살아 계실 거야. 해마다 연하장이 오니까."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군."

"맞아."

"형제는?"

"나하고 쌍둥이인 여동생이 있어."

"어디에 있는데?"

"3만 광년 정도 떨어진 먼 곳에."








내가 세 번째로 잤던 여자는 내 페니스를 "당신의 레종 데트르(존재 이유)" 라고 불렀다.







그때 나는 그런 식으로 모든 걸 수치로 바꿔놓음으로써 타인에게 뭔가를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타인에게 전할 뭔가가 있는 한, 나는 확실히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내가 피운 담배 개비의 수나 올라간 계단의 수나 내 페니스의 크기에 대해서 누구 한 사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나는 자신의 레종 데트르를 상실하고 외톨이가 되었다.







내가 세 번째로 잤던 여자에 대해서 얘기하겠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 얘기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젊은 나이에 죽은 여자에 대해서 얘기하는 건 더더욱 어렵다. 죽었기에, 그들은 영원히 젊기 때문이다.







"좋아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아주 짧은 한순간이었지만.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 있어?"

"그럼."

"그녀의 얼굴을 기억해?"

나는 세 명의 얼굴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누구 하나 똑똑히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아니."

내가 대답했다.

"이상해. 왜 그럴까?"

"아마 그게 편하기 때문이겠지."






모든 건 스쳐 지나간다. 누구도 그걸 붙잡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울고 싶을 때는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 법이다.







"한낮의 빛이 밤의 어둠의 깊이를 어찌 알겠는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출판된 후에,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그게 소설이라면 나도 그 정도는 쓸 수 있다" 라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그 작품이 소설로 통용된다면 누구나 그 정도는 쓸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적어도, 그런 말을 한 사람 어느 누구도 소설을 쓰지 않았다.


-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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