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산악자전거
저는 바퀴가 달린 것을 좋아합니다. 이리저리 알아서 굴러가기도 하고, 제가 방향과 속력을 조절하며 움직일 수 있는 장치도 만들어 줄 수 있고, 동력장치가 추가되면 힘을 들일 필요 없이 공짜동력으로 이동도 가능하니까요. 그리고, 바퀴는 크면 클수록 그 모습에 경외감이 들고, "그 녀석 참 실하게 생겼다" 하는 든든한 마음이 들기도 해서, 바퀴가 달린 움직이는 집이라던가, 사고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몬스터 트럭같이 "이 놈이 어디에 붙어있으면 잘 어울릴까?"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 바퀴가 조용하고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구르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오토바이나 스포츠카에서 처럼, 굉음을 내고 중력에 상관없이 동력장치의 강한 힘에 의해 빠르고 거칠게 굴러가는 바퀴보다는, 정숙하고 부드럽게 예측할 수 있는 중력에 거스르지 않고 굴러가는 바퀴를 더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오르막에서는 저의 다리가 동력장치의 역할을 해야 하고, 그 다리는 동력장치보다 출력이 비교도 안되게 낮고, 연약하여 느리고 쉽게 피로를 느끼겠지만, 내리막에서는 가볍고 부드러우며, 지구의 중력을 오롯이 느낄 수가 있습니다. 또한, 중력은 웬만한 동력장치보다 훌륭한 동력장치이지요. 형체가 없어서 기계를 가볍게 만들 수 있고, 그로 인해 기민한 기동성과 민첩성, 제어가능한 운전범주가 넓어 꼬불꼬불한 길이라 할지라도 빠른 속도로 내려올 수 있기에 오히려 오토바이나 자동차보다 빠를 때도 있습니다, 외마디 비명 없이요.
위험성을 지적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물론 위험하지요. 오토바이도 위험하고, 스릴 있고 재미있는 웬만한 것들은 다 위험합니다. 그리고, 오토바이보다 가볍기 때문에 같은 속도에서 오토바이보다 상대적으로 더 노면환경이나 제동에 취약한 것도 사실입니다. 가볍고 바퀴의 폭이 좁아 오토바이보다 접지력이 떨어지는 것도 맞고, 오르막을 편하게 오르려면 자전거가 무거워지면 안 되니, 성능이 좋은 브레이크를 무작정 설치할 수도 없지요. 게다가, 가볍고 경쾌하니 타는 자가 속도의 스릴을 주체하지 못해 과속을 해서 사고가 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지요. 하지만, 굳이 방어를 하자면, "위험"이라는 우려보다 "운동"이라는 순기능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20분 신나게 내려오기 위해서는 2시간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막을 올라가야 하고, 그 과정에서 허벅지와 심혈관, 유산소 운동이 동시에 될 테니까요.
물론 요가를 하기는 하지만, 요가는 유산소 운동이 아니기도 하고, 고강도의 다리운동도 아니기도 하며, 힘든 심혈관 운동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한 번 나가면 수 시간씩 타야 하는 자전거를 매일 타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한 주에 한 번 정도가 딱 적당해 보였습니다. 선천적으로 허벅지가 가늘고 다리근력과 지구력이 약한 탓에, 자전거 라이딩을 가기 전에 늘 힘들까 봐 두려워했었습니다. 물론, 다른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이지만요. 매일 규칙적으로 하는 운동이 아니라, 취미생활로 산악자전거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산악자전거를 처음 타기 시작한 것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2년 간 지낼 때였습니다. 그곳은 다양한 종류의 길(trail)을 잘 닦아놓았고, 그 길들을 지도에 넣은 어플리케이션이 있어서, 어디로 가면 어떤 수준의 트레킹/등산/암벽등반/스키/산악자전거를 할 수 있는지 쉽게 알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Meetup이라는 모임 어플리케이션을 통해서 산악자전거 모임을 찾아 가입할 수 있었고, 그 모임에서 라이딩 계획을 수준별로 공지하여 같이 탈 사람을 찾을 걱정을 크게 하지 않아도 되는, 산악자전거를 타기에 참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게다가, 길 대부분이 가파르지 않은 비포장 트레킹 코스라서 앞과 뒤 모두 충격흡수장치(일명 "쇼바"라고 부르는 서스펜션 장치)가 있는 자전거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탔습니다. 이런 자전거를 "풀샥 바이크(Full-shock bike)"라고 부르는데, 앞에만 충격흡수장치가 있고, 뒤에는 그것이 없어서 딱딱한 "하드테일 바이크(Hard-tail bike)보다 무게가 더 무겁고 가격이 보통 더 비쌉니다.
미국에서 지낼 때, 비교적 저렴한 풀샥 자전거를 한 대 구입해서, 자전거를 제법 많이 타러 다녔던 것 같아요. 집 근처에 있는 John Nicholas Trail이라는 곳을 제일 많이 갔었고, 제일 좋아했었어요. 그렇게 가파르지도, 완만하지도 않은 것이, 적당히 스릴이 있으면서 숲의 향도 좋았기에 찾는 사람들도 많았고, 라이딩 모임도 이곳에서 자주 했습니다. 제법 높은 곳까지 올라갔었기 때문에 경치도 끝내주게 좋았으며, 3시간 정도면 왕복할 수 있는 적당한 코스여서 큰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는 그런 곳이었어요. 미국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손꼽힌다는 타호 호수에 있는 Flume Trail도 가보았고, 산타크루즈 Wilder Ranch에서는 초행길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왼쪽 어깨뼈가 부러지는 부상도 당해 보았지요. 부상 후 재활운동중에는 부러졌던 어깨 주변근육이 굳어서, 팔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는데, 빠른 회복을 위해서는 원활한 혈액순환을 시켜주는 운동을 해야한다고 했습니다. 팔을 많이 움직일 필요가 없는 혈액순환에 도움이 되는 운동이 또 자전거라고 하더라구요. 결국 자전거로 다친 자가 자전거로 재활하는 아이러니함도 겪어 보았습니다. 초급자에게 맞는 입문용 자전거였지만, 많은 추억이 깃든 그런 자전거였고 취미였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자전거를 타러 나갔을 때, 라이딩 환경이 미국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국의 산과 길은 험준하고 가파르며,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대부분의 길들은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길이거나, 짚으로 된 가마니가 덮혀있는 등산로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비포장 도로가 있어도, 자동차가 갈 수 있도록 만들어 둔 길이었기 때문에, 평평하게 정비가 잘 되어있는 경우가 많구요.
맞습니다.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동호인들이 풀샥 바이크가 아니라 하드테일 바이크를 타고 있었습니다. 길이 덜 울퉁불퉁하며, 오르막이 심해 경량화의 니즈가 충격완화와 안정감의 니즈보다 더 높았으며, 미국에서 산악자전거는 40대 이상의 중장년층도 즐기는 취미인데 비해, 한국에서는 30대에서 40대의 동호인들이 즐기는 취미여서, 체력의 진입장벽도 미국에 비해 비교적 높았습니다. 그래도, 산악자전거를 타는 것이 로드자전거를 타는 것보다는 체력적 진입장벽이 낮을 수도 있는 이유는, 속력과 기록으로 성취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 경쟁적인 분위기가 어느 정도 있는 로드자전거 동호인들과는 달리, 산악자전거를 탈 때는, 몇 초만 뒤쳐져도 눈앞에서 앞사람이 사라져 버리는 산 길의 특성상, 안전을 위해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을 기다려주는 것이 동호인들 사이에서 습관화되어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자전거를 타기 위해 자전거 동호회를 찾았습니다.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 제가 사는 지역의 산악자전거 모임이 있더있더라구요. 그곳에서 처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라이딩을 시작했는데, 저의 무거운 풀샥 바이크로는 하드테일 바이크를 쫓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안 그래도 약한 다리를 갖고 있는데, 자전거도 무거우니, 같은 속도로 따라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입문급 하드테일 바이크 한 대를 중고로 구매해서 열심히 속도에 맞추어 쫓아다녔습니다.
서양사회는 개인의 선택과 프라이버시를 매우 중시하는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봉사를 하는 것도, 모임을 운영하는 것도, 라이딩 모임을 주최하는 것도, 모두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봉사이자 활동으로 여기지, 고맙다는 말로 노고를 인정받지 못해 서운함을 드러내거나, 그 인정의 기회를 뺏기는 것에 흥분하는 경우는 많이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모임의 공지 - 집결 - 출발 - 라이딩 종료 - 깔끔하게 해산이 정례화 되어있으며, 사석을 만들어 같이 밥을 먹거나, 끝나고 술을 한잔 한다거나 하는 문화도 찾아보기 힘들지요.
반면 한국의 동호회나 모임은 운영자의 권한과 그 권한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 매우 중요한 것 같았습니다. 회원들에게 각자 원하는 분야에서 더 인정받기 위해 애를 썼고, 그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갈등이 생겼으며, 정치계파와 같이 편이 갈라지는 현상이 보이지 않게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서로간의 연락처를 교환하는 것도 금기시 하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운영이나 모임주체에 적극적이지 않기도, 정보와 체력의 부재로 운영진 활동을 돕기가 힘들기도 했던, 제 입장에서는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경우가 웬만하면 없었긴 했지만요.
40명 남짓한 오픈채팅방에서 저와 나이대가 비슷하고 말이 잘 통한다고 느꼈던 3명의 사람들과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사는 곳도 비슷했고, 라이딩을 같이 즐길 시간대도 비슷했어요. 자연스럽게 넷이서 밥도 같이 먹게 되고, 자전거도 같이 타다 보니, 타인의 시선에는 단체 안의 사조직 같아 보였나 봅니다. 따로 모임을 하려거든, 따로 모임을 만들어라는 간접적인 메세지를 운영자로부터 듣고 난 다음에는, 한동안 4명이서만 자전거도 타고, 밥도 같이 먹고, 주말에 게임도 같이 하고, 각자 집에 놀러도 가고 하며 지냈어요. 이 도시에 이사를 온 지 거의 8개월 만에 처음 만든 지인들이자, 업무 외적인 사회적 모임이 생겼다는 것이 참 기뻤습니다. 제가 원했던 "정착"의 한 요소를 만들었고, 정붙이고 사는 삶에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었거든요.
한동안 신나게 라이딩을 다녔습니다. 바다로도 갔다가, 산으로도 갔다가, 신나는 다운힐도 즐겼다가, 무더운 여름을 즐겁게 같이 보냈었어요. 얼마 만에 생긴 새로운 친구인가 싶어 애착이 더 가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매일 단톡방에서 수다를 떨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금방 만날 수 있으며, 편하게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관계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게 지낸 지 두어 달이 지났을 무렵부터, 제게 자전거는 혼자 아주 가끔씩 타는 개인운동에 가까워졌습니다. 조금 더 지나서는 더 이상 타지 않고 지금까지 고이 모셔두고만 있습니다. 네 명 중 세 명이 같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천주교를 종교로 삼고 있는 저는 자연스레 주말을 그들과 달리 보내게 되었고, 종교의 차이로 서로 멀어지게 되었거든요. 안타깝지만, 물리적으로 어쩔 수 없는 생활패턴의 차이였겠지요. 대부분의 주말시간을 교회에서 보내니,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어울리기 힘든 관계가 되더라구요.
덕분에 마음이 따뜻했고, 즐거웠고, 행복했지만, 저는 새로운 이웃을 다시 찾아 나서야 했습니다, 정착을 위한 좋은 경험이자, 결이 맞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시행착오였다고 생각하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