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관의 인권을 말하다 (3)

by 키다리 아빠

범죄는 범죄인 개인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환경의 문제에서 그 발생원인을 찾는 것이 주류적 입장에서 현재의 우리 교정행정이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라 교육교화에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운영이 된다고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피부로 느끼는 것은 과도한 행동통제와 보안관리 위주의 운영으로 교육교화와 심리치료를 통한 심성순화는 더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상당수의 교도관들이 수용자에 대한 교육교화 노력들이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주장까지 하니 문제가 여간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 교육교화 무용론은 교도관의 정체성의 혼란을 야기하고 직업에 대한 자존감의 결핍과 심리적 괴리로 교정행정의 발전을 저해하는 주요한 원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는 교정행정이 과거 강압적인 처벌이 아닌 교육교화 패러다임으로 바뀌었으나 좀처럼 재범률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흉악범죄는 날로 증가하는 추세로 교육교화의 효과가 거의 없는 데다가 수용자 인권강화로 법이 무르고 공권력조차 무력하여 교도관이 오히려 수용자에게 시달림을 당하는 판국이니 차라리 그럴 바에야 과거 강압적인 처벌 위주 패러다임으로 돌아가자는 상당수 교도관들의 주장도 한몫을 차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 그런 시절에는 흉악범죄가 줄고 재범률은 낮았는지, 교도소 안에서 처벌과 강압에 말 잘 듣는 수용자들이 정신적, 신체적으로 어떠한 부작용이 드러나고 출소 후에는 어떻게 되는지, 딴은 교도관의 무능력을 교육교화 무용론으로 감추고 교도관만의 편리를 추구하기 위한 무사안일은 아닌지도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한편으로는 수용자에 대한 기존의 과도한 행동통제와 보안관리 위주의 방식을 탈피한다면 반대로 수용자들이 제멋대로 행동하고 규율을 위반하는 등 교도소 내 수용질서가 지금보다 더 현저히 무너질 거라는 우려를 할 수 있습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지적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지난 세월 삼청교육대, 청송보호감호소로 대표되는 수용시설에서 인권이 무참히 유린되는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을 지나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 이후 민주정권이 들어서면서 그에 부응하여 수용자 인권도 비약적으로 향상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수용자 인권의 향상은 그에 따른 적잖은 부작용도 낳게 되었는데요. 그건 소수의 문제수용자들이 인권을 악용하여 교도관의 정당한 공권력 행사에 대항하여 폭력을 행사하고 무분별하게 소송, 진정, 정보공개 청구 등을 남발하여 전체 수용질서를 문란하게 만드는 사태를 만들고 있고, 이에 대처하기 위한 인적, 물적 행정력의 낭비가 심각한 수준에 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정행정의 대응양식이 소수의 문제수용자들에게 관심이 집중되다 보니 그렇지 아니한 대부분의 수용자를 위한 심화된 교육교화 프로그램을 시행하는데 심각한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우리 교도소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정당한 인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권을 악용하는 소수의 문제수용자들에 대해서는 지금보다 더욱 엄격한 공권력 행사와 특별한 처우가 필요하다는 전제하에서 그 외 대부분의 일반 수용자에 대한 과도한 행동통제와 보안관리 위주의 방식을 탈피하여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교정프로그램으로의 구조적 혁신이 요청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수의 문제수용자에 대한 교육교화 노력을 포기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육교화 효과를 높이기 위한 명확한 강약 조절이 필요하다는 의미라는 것을 이해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문제수용자나 일반 수용자 모두에게 획일적으로 적용되는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솜방망이식 공권력 행사는 질서도 잃고 교화도 잃을 것이 자명한 경험칙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하여 교정시설에서 발생하는 화재, 도주, 사망 등 각종 교정사고를 예방하고 대응하는 것은 중요한 직무인 것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교정행정의 구조와 프로그램 및 인적, 물적 배분 현황을 면밀히 분석해보면 우리 교정행정의 적응 양식이 과도하게 교정사고라는 부정적 양식에 치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행태가 교도관에게는 마치 내 앞의 사고만 피해 가기 위한 폭탄 돌리기 양상으로 업무에 소극적으로 대처하게 되고, 군대처럼 경직된 권위적인 직장문화를 정당화하며, 수용자에게는 과도한 행동통제와 보안관리 위주의 처우 방식에 인적, 물적 제반 역량의 쏠림 현상으로 이어져 전체적인 교정행정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교도관의 역할은 출소자가 다시 범죄로 나아가려는 발걸음을 스스로 멈추고 되돌아오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마도 이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운 교도관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 문제의식 안에 복잡하게 얽힌 수용자, 범죄피해자 그리고 교도관의 인권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지, 교도관의 인터넷 커뮤니티 공간에서 수용자 관리의 곤란 문제나 교도관 처우개선 요구 등으로 수도 없이 넘쳐나는 내부 불만의 목소리가 진정 향해야 할 곳은 어디인지 그 진실이 숨어 있을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옛날을 회상해보면 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에 올인했거나 어리석었던 행동들을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그때는 왜 그런 생각을 못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까?'라는 의문 안에는 집단의 심리가 있습니다. 사람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을 함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찾는 경향성이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작게는 가정에서 시작해서 크게는 국가까지 어떤 조직이든 이러한 집단의 심리에 매몰되면 개별성이 위축되고 합리적 판단이 마비되는 현상이 발생하곤 합니다. 우리 교정현장도 과거에 그렇게 해왔으니 지금도 그렇게 계속하도록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이 울타리 안에서 우리가 혁신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 자신은 정작 모를 수 있다는 것을, 심지어 우리는 잘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조의 악순환을 끊는다는 것은 지엽적인 정책들만으로는 불가능한 영역입니다. 구조의 개혁은 근본적으로 사고의 개혁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새로운 생각의 전환 없이 무작위로 쏟아지는 정책들은 과거의 중복된 이미지의 나열에 불과할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익히 알다시피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지금껏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교도소는 새로운 교도관에게서 나올 것입니다.




선악의 프레임은 우리에게 일도양단으로 단순 명쾌하게 해결해주는 시원한 맛은 있어 좋을 것 같지만 오히려 세상의 복잡 다양한 문제를 마치 드넓은 평원에 흰색 꽃과 검은색 꽃으로만 가득 찬 끔찍한 풍경을 만들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갈등과 조정을 통한 문제 해결의 과정을 거쳐야 할 소중한 문제의식을 수면 아래로 끌어내려 우리들에게 편협한 사고를 강요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수용자의 인권주장은 바로 교도관의 반인권에서 나온다는 사고방식처럼 인권을 바라보는 시각이 인권 대 반인권의 구도로 극단에 놓인다면 반대 당사자를 오로지 악으로 규정하는 프레임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수용자의 인권, 범죄피해자의 인권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새로운 교도관의 인권은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간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이러한 인권의 중층적 구도를 폭넓게 이해하고 깊이 천착해 들어갈 때 비로소 전체적인 인권의 윤곽이 드러나고 나아가 진정한 교정행정의 비전을 수립하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이는 국가인권위원회 등 인권문제를 관장하는 모든 국가기관도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세상에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갓난아이까지도 사는 게 힘이 든다고 합니다. 사실 산다는 것은 힘이 드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힘을 빼는 일이기도 합니다. 계속 힘만 들이다가는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힘을 뺀다는 것은 내 안에 가득 들어찬 집착을 밖으로 내보내고 내 생각이 쉰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나의 집착에서 벗어나 전체를 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럴 때 우리는 모두 서로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알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 교도관이 되었을 때 선배들은 우스갯소리로 '전생에 지은 업보가 많은 사람이 교도관이 된다'는 말을 들려주곤 하였습니다. 업보(業報)를 풀어쓰면 인과론적으로 전생에 지은 죄가 많아서 현세에 지옥 같은 범죄인의 소굴에 떨어졌다는 의미로 해석이 되지만 달리 생각하면 힘들지만 교도관의 일을 함으로써(業) 지은 빚을 갚는다는(報) 좋은 의미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중략)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확신만이 내가 제대로 살 수 있는 가능성의 지표가 된다.

절망 또한 유독한 습관일 수 있으며, 희망 그 자체는 낙관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희망에 매달리는 일은 그리 낙관적인 것이 아니다.

새들의 비상은 오직 공기의 저항 때문에 가능하다는 사실.
너무도 당연한 것은 쉽게 잊혀진다. 삶이 그렇다.

생각해보라,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이성복 시인,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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