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바닥

by 키다리 아빠

주식투자 좀 해본 사람들이라면 공감하겠지만 주식 격언에 ‘바닥 밑에 맨홀 있고, 맨홀 밑에 지하 있고, 지하 밑에 맨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가 바닥이라 생각하고 이젠 주가가 오르려나 기대하지만 더 큰 하락의 공포를 경험하다가 결국 상장폐지까지 가는 끔찍한 결과를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주식의 바닥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바닥 오브 바닥’은 누가 뭐래도 인류 공통 교도소가 아닐까 싶습니다. 문제는 과연 이들이 지금 자신의 상황을 바닥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는가에 있습니다. 더 심각한 상황은 교도소에 수감되어서도 피해자나 사회에 대해 일말의 반성은커녕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고 단지 운이 없어서 잡혀 들어왔을 뿐 도리어 책임을 전가하고 날이면 날마다 직원을 애먹일 목적으로 수도 없이 정보공개, 진정, 소송을 남발하며 급기야 직원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는 소수 문제수 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을 것입니다.


지금 자신의 상황을 바닥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적어도 자기 객관화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피해의 회복, 관계의 회복이라는 진정한 반성의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지만 교도관으로서 매일매일 재소자들을 보고 느끼는 생각은 그리 희망적이지 못합니다. 대개 가석방이나 감형으로 조기 석방을 노리거나 교도소 내에서 발생한 관규 위반에 대해 처벌을 벗어나거나 각종 수감생활의 편의를 위한 거짓 반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나 저들에게 더없이 경멸스러운 것에 대해 말하련다.
인간말종(Der Ietzte Mensch)이 바로 그것이다 [...] 슬픈 일이다!
사람이 더 이상 그 자신 위로 동경의 화살을 쏘지 못하고,
자신의 활시위를 울릴 줄도 모르는 그런 때가 오고 말 것이니! [...]
사람이 더 이상 별을 분만할 수 없게 될 때가 올 것이다.
자기 자신을 경멸할 줄 모르는, 그리하여 경멸스럽기 짝이 없는 사람의 시대가 올 것이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교도소는 기본적으로 처벌 기능과 교육기능이 있습니다. 죄를 지었으니 응당 처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고 그다음 출소 후 사회로 복귀하여 범죄성을 억지하려면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처벌과 교육은 상호 모순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처벌은 교육적이지 않고 반대로 교육은 처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도소에는 이 두 개의 모호한 기능이 서로 동거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마치 언젠가는 파탄 나지 않을까 마음 졸이며 살아가는 살얼음판 위의 위태로운 동거처럼 말입니다. 교도관은 매일 그런 심리적 상황 속에 놓여 있습니다. 재범방지가 교정행정의 화두가 되어 각종 교육교화 프로그램을 가동하여 노력하고 있지만 재범률이 좀처럼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이유와 교도관 직무 갈등의 근본 요인이 이러한 모순에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아무리 개인역량이 뛰어난 리더가 와도 일선에서 근무하는 교도관들의 심적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직무에 대한 동기부여가 쉽게 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제는 채찍을 들었던 사람이 오늘은 인자한 모습으로 교육을 하는 상황은 그야말로 뺨 때리며 달래는 웃픈 상황입니다. 교도관과 수용자 간에 래포(rapport)를 형성하며 가까워지려고 해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벌어지는 심리적 간극은 감옥이라는 영역의 구조적 필연입니다. 교도관의 입장에서는 수용자가 관규를 위반하지 않는 지점까지, 수용자 입장에서는 이해(利害)의 영역을 침해받지 않는 지점까지가 서로 인내할 수 있는 심리적 마지노선인 셈입니다.

물론 교도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재소자가 드물게 갱생(更生)의 길을 걷는 감동스토리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자 그대로 감동스토리가 되는 것은 그런 사연이 아주 특별하기 때문이지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감동스토리를 기준으로 교도소를 판단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감동스토리를 보면 감동이 와야 하는데 감동이 오지 않는 이유는 일반적인 고충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단편성에 있을 것입니다. 교정행정 전반에 대한 이해와 접근이 필요한 구조적 문제를 개인적 역량의 유무만으로 돌리는 것은 사실상 무능을 감추는 위선에 가깝습니다.

가령 앞서 말한 수용자의 처벌 기능을 담당하는 보안부서와 기타 사무부서 대비 2:1, 보안부서와 순수 교육기능을 담당하는 부서 대비 8:2 정도대략적인 인력 비율을 보이는 것을 보면 과거부터 현재까지 우리 교정행정이 교육교화와 건전한 사회복귀를 교정행정의 목적으로 두고 있으나 실제로는 격리 구금이라는 처벌 기능에 편중이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교정행정에서 수용자의 격리 구금이 가장 기본적인 업무이므로 발생하는 현상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미래 교정행정의 비전을 제시하려면 보안업무에 편중된 인력, 교육담당자의 소수와 전문성 결여 등 각종 문제가 교육담당자를 늘리거나 전문가 초빙교육을 하거나 보안 인력을 재조정하는 리모델링만으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실상 구조적 문제는 구조를 해체하지 않고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영화나 매체에서 교도소와 교도관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기 일쑤여서 속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요즈음 ‘슬기로운 감빵생활’ ‘착하게 살자’ 등 일명 ‘깜드’가 유행을 타서 긍정적이고 호의적인 홍보를 자주 접하게 되니 교도관으로서 반가운 일이고 교도관이 아닌 재소자의 관점에서 감옥을 바라보는 시각을 접하면서 새로운 생각을 얻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전체적인 맥락과 구체적 사실성이 떨어지는 감옥의 희화화(戱畵化)는 자칫하면 사람들에게 감옥의 추상에만 머무르는 그릇된 메시지를 줄 수 있으며, 정작 구조적인 관점에서 미래 교정행정의 비전을 재정립하는 문제가 테이블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면에서는 양날의 검(double edged-sword)이란 점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생성’의 철학자 들뢰즈(Deleuze, 1925~1995)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창조’가 아닌 ‘유에서 유’를 만드는 ‘생성’을 주장하면서 '유'에서 '유'가 나오지만 나온 '유'가 특정한 '유'가 되는 이유는 ‘아장스망’-agencement(배치, 배열)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없는 것이 아닌 기존의 이미 존재하는 이질적 항들의 ‘아장스망’을 통해 이전에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전혀 다른 존재로 ‘생성’이 된다고 합니다. 이는 어떤 존재의 부재가 가져오는 절망적 자폐에서 벗어나 새로운 낯선 곳으로 향할 힘을 스스로에게서 나오게 하는 니체의 '힘에의 의지'의 다름 아닐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어떤 것으로도 확정되거나 정의될 수 없으며, 우리의 잠재된 가능성은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고 그 선택이 지금 각자의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한층 고양된 방향으로의 선택이 '아장스망'이고 '힘에의 의지'입니다.

있는 것은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은 것이란 없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


기존의 교정행정의 구조가 현재의 상황에 맞지 않다면 지엽말단만 바꾸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오래된 구조를 바꾸어야 합니다. 처벌 기능과 교육기능 둘 중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교육교화를 실질적인 최상위 개념으로 전환하고 그 아래에 보안업무 등 제반 기능을 두도록 새롭게 ‘아장스망’을 해야 합니다. 교정행정의 조직 구성을 전반적으로 재편성하고 업무를 재조정해야 합니다. 모든 교정행정 조직과 그 구성원이 실질적인 교육에 집중하는 시스템으로 구체적인 구조개혁이 필요합니다. 기존에는 보안의 틀 안에서 교육을 바라보았다면 이제부터는 교육의 관점에서 보안 등 제반 기능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교정행정이 보안 위주의 경직된 군대식 시스템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감시와 질서유지를 위해서는 일시적인 효과가 있을지는 몰라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우리는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재소자가 바닥에서 다시 그 밑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바닥을 치고 올라올 수 있는 힘을 길러주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제도적 구조 전반의 ‘아장스망’을 넘어 무엇보다 교도관 자신의 내면의 ‘아장스망’이 절실합니다. 결국 재소자의 변화는 자신의 의지 더불어 교도관의 변화, 우리들의 인식의 변화를 전제로 가능하기 때문일것입니다. 다시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생명을 발견하는 곳에서 나, 힘에의 의지도 함께 발견했다 [...]
보라, 나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존재다.
[...]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Übermensch, 超人)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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