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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다리 아빠 Jan 29. 2022

게으른 아빠의 정원일기 #7

중립과 무관심은 다르다

올해 여덟 살이 된 큰 딸아이와 네 살이 된 둘째 아들은 자주 싸운다.

서로 애착하는 장난감이나 물건들이 자기 것이라고 잡아당기며 울며불며 싸울 때가 가끔 있다.


아직 말을 이해 못 하는 아들보다는 딸에게 먼저 양보하는 마음을 원하지만 딸은 왜 늘 동생한테 자기만 양보하냐며

따지기 일쑤다.


아빠로서 누구 편을 들 수 없는 상황이 난감하기만 한데

사실 아빠는 어느 편도 아닌 너희 둘 다 같은 편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해시키기는 어려운 문제이다.

얼마 전  소파에 앉아 TV 뉴스를 보고 있는데 대뜸 큰딸아이가

"아빠! 아빠!  이재명 아저씨가 1등이야? 윤석열 아저씨가 1등이야? 이재명 아저씨가 대통령 되는 거야?"라고 묻길래


또래 아이답지 않은 질문에

"어떻게 대통령 후보 이름을 다 알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물으니까

"그냥 아빠 뉴스 볼 때 보니까 다 알게 됐어"라고 쿨하게 말한다.  기특하고 대견스럽다.

(뉴스를 보다  잠자는 아빠를 그린 딸의 그림 ^^)

중립을 지키는 것과 무관심은 전혀 다르다.


부모가 아이들 스스로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 하고 아이의 싸움에 무관심하면,  우리 모든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대통령 선거라는 정치행위에 무관심하면 어떻게 될까?


이것은 공무원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다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이 어느 한쪽 편을 일방적으로 드는 것을 경계하라는 것이지 정치적 무관심을 가지라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공무원도 선거 당일에 투표장에서 투표를 통하여 정치행위를 하는 사람이다.


사실 중립은 균형감각을 가진 적극적 관심의 표현이다.  

관심을 갖되 균형적,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여기의 중립은 단순한 흑백논리의 어중간한 회색지대가 아니다.

어떤 색깔이 다른 색깔에 묻혀 자기 색깔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색깔들이 제 각각의 색깔을 낼 수 있도록 색깔과 색깔 사이의 여유 공간을 말하는 것이다.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비단향꽃무, 튤립, 히야신스)

사람과 자연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너무 자연에 간섭하면 자연이 망가지고 결국엔 사람마저 망가지게 된다.


과잉관심과 무관심은 균형을 상실한 양극단의 표현이다.


여름 정원에 핀 수많은 꽃과 나무들이 아름다운 것은 자기의 색깔을 갖되, 다른 쪽의 색깔을 배제하지 않는 것에 있다.


겨울 정원에 소복이 쌓인 하얀 눈꽃이 아름다운 것은 마른 식물의 줄기와 검고 앙상한 나무 가지를 포근하게 감싸기 때문이다.

중립은 차가운 단절이 아니라 따듯한 접속이다.    


피아노 건반 하나의 음이 다음 건반의 음으로 서로 이어지듯이.

기타 현 하나의 떨림이 다음 현의 떨림으로 서로 이어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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